※ 〈여행과 나날〉 첫번째 촬영현장 취재기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고전영화를 재료 삼아 떠난 여행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등과 모여 영화 스터디를 한다는 미야케 쇼 감독은 소문난 고전영화 탐닉가다. 〈여행과 나날〉은 미야케 감독이 그동안 쌓아 온 고전 영화가 영감이 되어 많은 부분이 풍성하게 채워진 영화다. “감독님 정말 영화광이세요. 버스터 키튼, 오즈 야스지로 등등 챙겨보라고 한 영화도 많았어요.”라고 하지만, 은경도 그 부분에서는 만만치 않은 씨네필이다. 오즈 야스지로의 격식과 에릭 로메르의 심상이 오가는 가운데, 버스터 키튼의 몸짓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의 탄생은 분명 둘의 영화 취향이 사이좋게 배합 된 결과일 것이다. “은경 배우는 정말 대단한 배우예요. 첫 만남부터 같이 작업하고 싶은 배우였는데 촬영 내내 즐거웠어요.” 바쁜 가운데서도 미야케 쇼 감독이 내게 심은경과의 작업이 주는 기분을 전달해 준다.


눈밭에 설치한 현장 모니터로 실내에 자리 한 배우의 모습을 지켜 보았다. 거의 모든 장면이 풀샷이라고 할 정도로, 드넓은 설국의 풍광 안에 작은 여행자로 들어온 이는, 이곳 여관 안에서 감추어 두었던 자신의 표정을 드러낸다. 그만큼 오늘 촬영은 이의 감정을 면밀히 볼 수 있는 중요한 장면이기도 하다. 나무로 지어진 여관의 색감을 머금은 듯, 이는 짙은 브라운 톤의 스웨터 차림이다. 유독 하얀 배우의 얼굴이 캄캄한 실내의 조도와 대비되어 한층 창백해 보이는데 그 모습이 마치 오즈 야스지로의 시대 속, 다다미방에 무릎을 꿇고 앉은 하라 세츠코의 모습처럼 정갈해 보인다. 1:37:1으로 촬영하는 이 영화의 고전적인 화면비 속에 위치한 심은경에게서 전에는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클래식한 아름다움이 엿보인다.
협소한 공간. 따로 구획되지 않은 공간에 적잖이 당황할 만한 상황을 지나, 이는 이 공간에 자신을 적응 시킨다. 그렇게 이는 침잠해 있던 일상을 흔들어 줄, 낯설지만 위협적이지 않아 금새 친근해진 중년의 여관주인 벤조와 감정의 교류를 나눈다. 이 관계는 그러니까, 생면부지인데도 여행지에서 만난다면 기간한정으로 속내를 끄집어내어도 좋을 것 같은 그런 만남에 가까워 보인다. 차이가 있다면, 이 소통엔 크게 오가는 대화가 없다. ‘말이라는 틀에 갇혀’있다가 멀리 도망 온 이의 심경을 표현한 나레이션 처럼 이 여행은 “말에서 도망치는 행위”, 죽은 언어를 묻고 새로운 언어를 생성하는 일 일 지도 모른다.

‘컷’ 소리와 함께 배우가 모니터 앞으로 달려 나온다. 여관 안의 사색가 이는, 문밖을 나서는 순간 이내 심은경 자신이 된다. 마침 방한을 위해 입은 심은경의 초록의 패딩이 사방의 눈과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마치 초록초록 한 여름의 나뭇잎 같아서 고된 현장에 싱그러운 칼라 테라피를 해주는 느낌이다. 난방이 되지 않는 실내는 햇빛이 비치는 바깥보다 한참 더 추울텐데도 초록을 머금은 배우에게선 즐거운 기운이 역력하다. “매일 매일 기다려지는 현장은 정말 처음이에요. 현장에 오는 게 늘 즐거워요.” 미야케 쇼 감독이 들으면 정말이지 좋을 말이지 싶지만, 감독은 저 멀리서 연신 노트에 무언가 써 내려 가느라 바쁘다. 그러고 보니 현장에 오기 전 “대사를 다 외운다”는 심은경 배우와 달리, 미야케 감독은 촬영 내내 무언가를 쓸 요량으로 귀에 연필을 꽂고 있었다. 컷과 컷 사이, 오렌지색 가방에서 검은 캠퍼스 노트를 꺼내 연필로 적는 게 눈에 띄어 호기심에 물었다. “비밀노트인데, 아무 것도 없어요.” ‘낙서장’ 일 뿐이라는 그가 “아이패드를 안 쓰고 노트에 써요. 아버지가 건축설계사라 어릴 때부터 연필로 작업하시는 걸봤는데 생각해 보니 그 영향이었던 것 같다.”는 말을 들려 준다. 이 답변은 후에 완성된 영화에서, 매혹적인 여러 장면 중, 종이노트에 연필로 꾹 눌러쓰는 이의 시나리오 처럼 보여서, 묘한 기시감을 안겨주는 답변으로 기록됐다.




우연이 선사한 삶의 또 다른 경로
현장의 북적임도 쌓인 눈에 고요하게 수렴되는 곳. 분주한 현장의 하루가 그렇게 흘렀다. 스탭들에게 들어보니 매일 촬영이 시작되기 전 아침이면, 미야케 감독과는 첫 작품부터 같이 한 영화의 조연출 감독이 자필 편지를 써서 모두에게 전달해 준다고 한다. 오늘 촬영도 힘 내서 잘 하자는 부탁이자 다짐의 말이다. 고된 촬영 중에도 열량을 내 줄 손편지 에너지 바도 효력을 다해 갈 즈음, 산 속의 하루도 급히 저물기 시작했다. 낮동안 내어 준 햇빛이 오래 머물렀던 자리, 기온이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겨우 내 진행 된 촬영 여정도 이제는 정말 거의 막바지에 도착했다. 촬영을 마무리하며 이제 배우의 마음 한켠엔 ‘서울, 일상으로 복귀’도 자리할 것이다. 마치 ‘여행’처럼 이곳에서 작업을 하는 동안 감독은 “이 여행이 가야 하는 길을 한층 더 알게 됐다”고 말한다. 애초 계획한 장면의 경로를 조금씩 수정하면서, 영화는 그렇게 불확실성과 우연만이 선사해 줄 수 있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결정체를 건져 올리기 위한 마지막 피치를 올리고 있었다.
그 사이 어둠이 찾아 온 산, 새하얀 설산이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출 때까지도 여관의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밤 하늘엔 내가 사는 서울에서는 보지 못했던 별빛이 신기할 정도로 가득했다. 나에게도 평생 ‘여행’이라는 매혹적인 카테고리에 이 영화를 위치하도록 해줄 소중한 밤이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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