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취재] '여행과 나날' 촬영지, 배우 심은경과 함께 눈덮인 고장 야마가타로의 여행 ①

글과 사진 이화정. 씨네플레이 이화정 객원기자가 미야케 쇼 감독, 심은경 배우의 〈여행과 나날〉 촬영현장을 다녀왔다.

촬영현장의 심은경 배우(왼), 미야케 쇼 감독 (사진=이화정)
촬영현장의 심은경 배우(왼), 미야케 쇼 감독 (사진=이화정)

올 3월 초 반가운 소식이 왔다. 심은경으로 부터 온 〈여행과 나날〉 촬영장 초청이었다. 일전에 만났을 때 미야케 쇼 감독의 작품 촬영으로 일본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어느 새 촬영이 막바지에 이른 참이라고 했다. 현장을 보려면 서둘러 짐을 싸야 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사실 한번도 그려보지 못했던 조합이었다. 애써 힘을 쓰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상처 입은 인물들의 내면으로 파고드는 미야케 쇼의 카메라 워크는 사람의 정서를 잡아 끄는 은근하고 쎈 힘을 지녔다. 매 작품 장르와 서사 안에서 캐릭터를 맞춤복처럼 입고 완수하는 배우 심은경의 연기와는 또 다른 영역. 둘 각자의 스타일에 새로운 틈이 생길 것 같았다.

〈여행과 나날〉의 여관이 있는 이곳은 무수히 많 일본 드라마와 영화의 촬영장으로, 일본 최대 규모의 오픈 세트장 ‘스튜디오 세딕(STUDIO SEDIK)’ 이다. 영화 〈오싱〉도 이곳에서 찍었다. 현장 안내를 해 준 세딕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해리 포터〉도 찍을 수 있는 규모”로 크기가 도쿄돔의 20배에 달할 정도의 대규모 촬영장이다. (사진=이화정)

도심을 벗어나 자연 가까이, 일탈을 향해

심은경 배우가 지금 ‘위치’해 있는 곳의 좌표를 찍으려면 이 영화의 〈여행과 나날〉의 구조에서 찾아야한다. 먼저, 고심하며 각본을 쓰는 이의 등장. 심은경이다. 이가 종이에 쓰는 신들은 곧바로, 뜨거운 여름, 바닷가로 여행을 온 두 남녀의 만남으로 스크린에 펼쳐진다. 그리고 이내 스크린에 구현된 각본의 장면을 보는 이, 그리고 영화가 끝난 후 관객과의 대화를 위해 감독과 함께 무대에 오른 이는 행사가 끝난 후 참석한 교수님께 “일에 통 집중할 수가 없다”고 심경을 토로한다. 교수님은 그때 “머리도 식힐 겸 어디 좀 다녀오세요”라고 조언 하는데, 결과적으로 교수님과의 마지막 만남에서 주고 받은 이 말이 이를 떠나도록 종용한다.

돌아보니 이 영화의 시작도 토크 행사로 부터였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미야케 감독의 영화 〈너의 눈을 들여다 보면〉을 공개하는 자리에, 심은경 배우가 작품을 추천해 줄 게스트로 초청되었고, 그때 두 사람은 “언제고 같이 작업을 하자”고 하며 헤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야케 감독이 심은경 배우에게 함께 작업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츠게 요시하루의 만화 〈해변의 서경〉(1967)과 〈눈집의 벤씨〉(1968)를 엮어 만든 작품으로 이 영화의 작가 이가 한국인자, 쓰게 요시하루의 원작의 남성 여성으로 바뀐 건, 그리고 이가 쓰는 시나리오가 미야케 쇼 감독에겐 외국어인 한국어 인 건 심은경의 캐스팅 때문이었다. 그렇게 배우에게서 영감을 받아 이의 캐릭터가 구체화 될 수 있었다.

타임 머신을 타고 과거로 도착한 것 같은 영화 속 여관 (사진=이화정)
타임 머신을 타고 과거로 도착한 것 같은 영화 속 여관 (사진=이화정)

영화의 1부에 해당하는 ‘여름’ 편, 도쿄의 섬 ‘고즈시마‘를 배경으로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들이 푸른 바닷가를 여행한다면, ‘겨울’ 편의 공간인 이곳에서는 영화를 벗어나 작가 자신의 여행을 하는 셈이다. 그렇게 작가 이가 떠난 겨울의 여행지이자 영화의 2부가 펼쳐지는 곳이 바로 일본 북서부에 위치한 야마가타 현의 쇼나이 지방. 심은경은 이곳에서 소소하지만 예기치 않았던 일들이 속출하는, 작가 이의 2박 3일의 여정을 한달 여 넘게 찍고 있는 중이었다.

영화의 촬영지는 인적이 드문 고즈넉한 곳이지만, 조금 확장해서 이 지역을 들여다 보면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온천 작화에 영향을 준 긴잔 온천 지역이 지근에 있다. 무엇보다도 이곳은 북해도의 아키타, 니카타와 인접한 곳으로 모두 겨울 폭설로 유명한 지역이다. 〈여행과 나날〉의 겨울 편으로 이 장소가 필요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여관을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촬영을 하러 갈때와 컷! 이후 심은경 배우의 온도가 달라진다. 연기를 할 때 배우의 집중도는 모니터를 보는 나도 숨죽이고 긴장하게 만든다. (사진=이화정)

돌아보면 미야케 쇼 감독의 영화에는 아마도 처음이라 할 만한 대자연과의 만남이기도 하다. 〈와일드 투어〉(2019)로 길 위로 나와 식물을 채집하는 인물들을 기록하긴 했지만, 미야케 감독의 인물들은 대개 도심의 한가운데 대게 익숙한 장소에 머물러 왔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18)의 청춘의 공간과 서점,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2022)에서의 허름한 복싱 체육관, 〈새벽의 모든〉(2024)의 과학 키트를 만드는 작은 중소기업의 사무실 같이, 우리 주변의 익숙한 공간에서 평범한 일상에 노출 된 채 감정의 북적임을 발산하던 인물들에서 벗어나 미야케 쇼 감독은 이 영화의 주인공인 각본가 이에게 도심이라는 일상에서 이탈 할 잠깐의 여유, 자연 가까이로의 여행을 시간을 부여한다.


〈여행과 나날〉 촬영현장으로 향하는 길 (사진=이화정)
〈여행과 나날〉 촬영현장으로 향하는 길 (사진=이화정)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는 신비한 여관

촬영장은 도쿄에서 비행기로 1시간 거리. 그런데 때 아닌 폭설!로 결항이 됐고, 결국 계획을 늦춰 다음날 오전 서둘러 출발을 했다. 눈이 많이 온다더니 그 유명세를 치르 듯 3월에도 폭설이 오는 곳. 새벽 녘, 벌써 촬영팀은 마을에서 한참 떨어 진 현장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촬영은 작은 마을을 감싸 앉은 산 속 어디쯤에서 이루어 진다. 영화에서는 만실이 된 호텔의 직원이 “저 산너머예요”라고 알려 준 여관이 위치한 곳. 지도에는 담기지 않아 작가 이를 잔뜩 긴장하게 만들었던 미지의 영역이다.

가만 보면 이 여행을 떠나기 전, 한국에서 일본으로 와 터전을 잡은 그때의 이에게도 막 일본에 도착 때 가졌던 이방인의 긴장이 존재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차츰 일상에 익숙해 졌던 참, 슬럼프에 빠진 시나리오 작가는 우연한 기회로 불확실한 지도에 의지해 ‘미지’와 ‘모험’을 향해 발을 뗀다. 그곳에 도착하면 정말 호텔 직원이 설명해 준 여관이 있을까. 보장은 없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더이상 그가 글을 쓸 수 없을 지 모르는 이상한 절박함이 감돈다. 촬영장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록, 그 경로가 마치 판타지장르에서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는 주인공이 되어 이가 걸었을 그 경로를 따라 가보는 기분이 든다.

‘하필’ 좋은 날씨로 눈길이 모두 녹아 진흙탕이 됐다. 스탭들이 오전부터 간이화장실과 현장을 이어 줄 나무 판자를 길에 깔아놓았다. (사진=이화정)
‘하필’ 좋은 날씨로 눈길이 모두 녹아 진흙탕이 됐다. 스탭들이 오전부터 간이화장실과 현장을 이어 줄 나무 판자를 길에 깔아놓았다. (사진=이화정)

작은 승합차에 올라 타고 마을을 떠나 본격적으로 촬영지에 가까워졌다. “촬영 내내 눈은 원 없이 봤다”는 심은경 배우의 전언이 곧장 실감이 나는 풍경이 창 밖으로 펼쳐졌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이라곤 정말이지 새하얀 눈 밖에 없다. 쌓인 눈에 찻길을 내다보니, 차 보다 높이 쌓인 눈이 벽이 되었다. 말그대로 눈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경로다. 이 정도 스케일의 눈을 경험하는 건 앞으로도 흔치 않겠지. 야마가타 사람이 아니라면, 그 정도로 쌓인 눈은 누구나 ‘생애 처음’ 보는 풍광 일 것이다.

“날씨가 너무 좋아 걱정”이라는 현장 스탭은 한편으로는 현장에 온 손님을 향해 연신 “길이 질퍽해 죄송하게 됐다”고 거듭 사과를 한다. 눈이 녹아 진흙창이 된 바닥에 신고 온 방한화가 금새 새까매졌다. 기온이 올라가면서 오늘은 현장 스탭들에겐 비상이었다. 영화에는 내내 눈이 쌓여 있어야 하니, 여기저기서 삽으로 눈을 퍼 촬영지인 여관 앞에 쌓아 올리느라 바빴다.

영화 속 여관은 마치 일본의 전통 가옥 전시장에서, 아니 오래전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에서나 본 것 같은 모습이다. 집기들 모두 골동품 수준. (사진=이화정)

​그리고 드디어! 눈 앞에 이가 묵게 된 곳이자,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이에게 일상을 벗어난 특별함을 부여할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지붕 위로 눈이 족히 200센티 정도는 쌓여 있는 나무로 된 작은 집. 오늘 촬영은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낮 촬영이지만 영화 속에서는 여관주인 벤조(츠즈미 신이치)와 이가 함께 마주앉은 밤 씬 의 촬영이다. 커다랗고 검은 천을 펼쳐 든 제작진이 내게 다가 와 “일본의 최신식 밤을 만드는 방법입니다.(웃음)”라고 실내를 어둡게 하는 아날로그 스킬을 설명해 준다.

폭설로 유명한 이 고장은 3월 초도 여전히 한겨울이라고 했다. (사진=이화정)

타임 머신을 타고 과거로 도착한 듯, 여관은 마치 일본의 전통 가옥 전시장에서, 아니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에서나 본 것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 설산을 뒤로 하고 어두컴컴한 실내로 들어가면, 한기를 물려 줄 중앙의 화로를 두고, 오래 전 집기들로 가득 차 있다. 이에게는 마치 박물관의 전시품 같아 보일 수 있지만, 이곳에 터를 잡고 기거하는 벤조에게 이 물건들은 ‘일상’을 유지해 줄 손때 묻은 생활의 도구다. 우연한 기회에 보물섬 지도를 손에 넣고 여행을 떠난 이들의 모험을 그린 〈보물섬〉을 집필한 작가로 그 역시 낯선 여행지에서 정착을 하게 된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낯선 땅이란 없다. 단지 여행자가 낯설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나의 여행이 누군가에는 매일의 일상이므로. 그렇게 이는 자연가까이 멀리 떠나 만난 여행지에서, 타인의 일상을 경험하고 공유하며 자신의 일상에서 정체된 마음을 비우고, 정체되지 않은 신선한 사유를 채워 나간다. 그렇게 다시 글을 쓸 힘을 얻는다.

※ 〈여행과 나날〉 촬영현장 취재기는 두번째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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