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은빈은 채니처럼 인터뷰 장소에 등장했다. 노란색 뜨개 두건과 오버핏 남방으로 세기말의 감성을 완벽히 소환한 그는, 〈원더풀스〉 첫 대본 리딩 때 입었던 옷이라며, 초심을 되찾고자 한다고 했다.
박은빈은 작품이 끝날 때마다 라운드 인터뷰 자리에서 비로소 캐릭터를 떠나보낸다고 했다. 빼곡한 포스트잇과 손때 묻은 〈원더풀스〉 대본을 뒤적이고 당시의 호흡을 복기하며 인터뷰에 임한 그는, 데뷔 30주년이라는 내공이 무색하게 매 순간 ‘진심’으로 ‘초심’을 소환한다.
박은빈이 출연한 넷플릭스 시리즈 〈원더풀스〉는 종말론이 유행하던 1999년 세기말, 우연히 초능력을 가지게 된 동네 ‘모지리’들이 평화를 위협하는 빌런에 맞서 세상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초능력 코믹 어드벤처다. 이뤄본 적 없고, 쟁취해본 적 없고, 바라는 게 뭔지도 몰랐던 사람들이 초능력이라는 뜻밖의 기회를 손에 쥐고 처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 속, 박은빈이 연기한 채니는 그 중심에 있다. 박은빈이 연기한 ‘은채니’는 막무가내 성격으로 ‘해성시 공식 개차반’으로 불리는 인물로,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해외여행을 떠나기 위해 할머니 몰래 계획을 세우다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순간이동 초능력을 얻게 된다.
〈원더풀스〉는 지난 5월 15일(금) 공개 이후, 글로벌 TOP 10 비영어 쇼 6위에 등극하는 등 글로벌한 인기를 얻고 있다. 22일 오후, 박은빈과 씨네플레이는 서울 종로구 모처에서 만나 〈원더풀스〉 비하인드부터 데뷔 30주년을 맞은 소감까지,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다. 아래에 그 대화의 전문을 옮긴다.

오늘 스타일이 굉장히 은채니 같으시네요.
오늘은 살짝 은채니스럽게 기자님들 찾아뵙고 싶었어요. 그래야 저도 은채니의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렇게 준비하고 왔습니다. 이건 제가 처음 대본 리딩 했을 때 입었던 옷이었는데요. 그때의 초심을 데리고 오려고요. 모자는 생전 한 번도 써보지 않았던 건데 어울리지 않을까 싶어서, 평소에 제가 시도하지 않았던 스타일로 입어봤습니다.
그 ‘초심’은 어떤 마음이었나요?
대장정의 시작을 알리는 출발선에 선 어떤 그런 마음이요. 사실 마라톤을 안 해봐서 마라톤 이야기를 할 수는 없겠네요.(웃음) 대장정을 앞에 두고 ‘이제 잘 뛰어봐야겠다’라고 생각을 했던 그 초심이 생각이 납니다. 왜냐하면 8부작이지만, 사실 촬영 기간이 그 이상의 작품처럼 길 수 있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시작했던 작품이어서 각오를 단단히 하고 시작을 했었죠.

세기말을 배경으로 한 작품인 만큼 채니의 스타일링이 독특했습니다. 본인이 아이디어를 내었나요?
처음에 각 팀에서 레퍼런스들을 다 찾아봤는데요. 처음에 저에게 제안 주셨던 드라마 팀의 의견들은 이를테면 머리띠를 한 모습이었어요. 근데 제가 생각했을 때 ‘개차반’은 할머니의 등짝 스매싱을 부르는, 그런 모습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어요. ‘큰손식당’의 ‘킹전복’(김해숙) 할머니의 아성과 어울리지 않는, 혀를 쯧쯧 차지만 동네 사람들의 애정 어린 시선을 받을 수도 있고 또 한심한 시선을 받을 수도 있는 그런 모습들을 외형적으로 구현하고 싶었어요. 레퍼런스를 찾아봤을 때, 제가 발견한 Y2K 시절의 사진들은 오렌지빛, 주황색 색감이 많이 느껴져서 ‘주황색을 좋아하는 채니’로 접근을 해보자 싶었고요. 또 이제 ‘해성시’라고 하면, 언어유희적으로 별, 혜성 같은 느낌도 들었고, 채니가 히어로가 되는 인물이다 보니까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문양인 별을 활용했죠. 또, 그 시절 채니는 락을 좋아했을 것 같은 느낌이라 해골 문양도 많이 사용했어요. 개인적으로는 해골을 정말 좋아하지 않지만요.(웃음) 범접할 수 없는 포스를 내고 싶었던 욕심 섞인 제안이었는데 다행히 잘 구현해 주셔서 마음껏 활개를 칠 수 있었습니다.
대중들이 생각하는 박은빈 배우는 ‘모범생’의 이미지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채니는 ‘개차반’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대척점에 있는 인물인데, 내면은 어떻게 쌓아 올리셨나요?
1화에서 채니가 ‘Creep’을 들으면서 터덜터덜 걸어가는 뒷모습이 나오는데요. 정말 추울 때 촬영한 장면이었는데, 보조 출연해주신 모든 분들이 1999년의 시대상을 반영하기 위해 모두가 다 너무 잘 꾸미고 계셨어요. 그래서 ‘내가 기세에 밀리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이 거리에서 ‘동네 개차반’이라는 공식적인 별명을 얻을 정도면 제가 확고하게 캐릭터성을 갖춰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기세로 연기를 한 부분이 있었어요. (‘개차반’을 연기해서 그런지) 현장에 도착하면 다른 선생님들이 채니의 인사를 낯설어하시더라고요.(웃음) ‘혹시 나를 못 알아보시나’ 생각하면서 연기를 했던 것 같아요. 위아래 없고 심통이 잔뜩 나 있어서 세상에 부딪히는 연기를 했지만, 또 컷 소리가 나면 다시 공손해지고 그랬었습니다.
8부작의 호흡 동안, 코미디의 텐션을 유지하는 강약 조절이 숙제였을 것 같은데요.
은채니가 다운이 되면 전체적으로 조금 더 어두워질 수 있기에, 채니의 강력한 캐릭터성을 그대로 밀어붙여서 유지해야 했어요. 중간에 잠시 ‘영원의 아이’의 심장 때문에 조금 다운되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 부분으로 가기까지, 시청자분들이 이 사람들(‘원더풀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잡아둘 수 있었다면 참 좋겠다는 책임을 가지고 있었죠. 그래서 그냥 흘러가듯이 연기하면 너무 평범해질까 봐 고민이 많았습니다. 이 작품은 장르 변환이 굉장히 빨라요. 감동을 주려다가 바로 코믹으로 넘어가고, 또 액션을 하다가 스릴러적인 모먼트를 겪고요. 캐릭터의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진심이 있으면 어느 정도의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겠다 싶어서, 텐션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취향에 맞으셨다면 다행이고, 혹시나 시끄러우셨다면 죄송합니다.(웃음)
채니가 거친 행동들을 하는 이유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감추기 위한 방어기제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채니가 ‘개차반’이 된 이유에 대해, 박은빈 배우는 어떻게 해석하셨나요.
채니는 세상에 대해 심통이 가득 나 있다고 생각했어요. 물리적인 제약이 심장에 걸려 있다 보니 채니를 삐뚤어지게 만든 게 아닐까 싶었고요. ‘오늘 할 말을 참으면 내일 당장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전전긍긍하는 성격적 특성도 있었죠. 누군가에겐 비호감일 수 있지만 채니 나름대로 세상을 열심히 살아나가는 방식이었고, 세상에 대한 외침을 내외적으로 발산하는 캐릭터라 생각했습니다. 심장도 아픈데 스트레스로 죽진 말자는 마음으로 그때그때 풀어 나갔던 역동들이 삶의 동력이 되었겠죠.

사실 시한부라는 비극적인 설정과, 유쾌한 유머가 공존하는 작품이잖아요. 그래서 〈원더풀스〉의 독특한 유쾌함이 탄생한 것 같은데요. 비극과 유머가 공존하는 장면 중,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요.
대본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은 장면은 ‘나는 5월 5일 죽었다’라고 돌연사하는 부분이었어요. 초반에 채니가 죽어버리니까 ‘뭐지, 왜 죽지?’ 하고 플롯에 대한 궁금증이 크게 들더라고요. 근데 그 속에서 대사가 너무 웃긴 거예요. 로빈(임성재)이가 ‘채니야, 눈 좀 감아줘. 무서워’ 하는 것들이나, 시체 역할을 하는데 채니가 계속 눈을 뜨고 있으니까 개진상(최대훈) 씨가 눈을 안 마주치려고 하는 부분들이요. 비인간적인 시체 유기 장면인데 ‘웃픈’ 블랙 코미디 같은 부분이 있어서 되게 재미있었습니다. 물론 눈 뜨고 죽는 역할은 저도 처음이라 어렵긴 했습니다. 먼지도 많이 날리는 현장에서 안과 없이 눈을 뜨고 있는 게 쉽지 않았지만요. 그렇지만 잘 죽었죠?(웃음)
와이어 액션부터 초능력 발현 장면까지, 육체적으로도 고된 현장이었을 텐데요. 그 과정에서 고충은 없었나요.
이렇게까지 몸을 많이 쓰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하긴 했습니다.(웃음) 모든 등장인물이 피땀 눈물에 절여진 채로 있으니, 서로 멀쩡한 모습을 본 날이 며칠 없었던 것 같아요. 특히 하네스(와이어 액션을 위한 벨트)를 입고 있으면 하루 종일 불편하기도 하고, 자력이 아니라 여러 인력에 의해 저를 매달아 놓으시니까 ‘이렇게도 사람이 매달릴 수 있구나’ 싶기도 했고요. 안 매달아 본 와이어가 없을 정도로 와이어 액션 경험은 다 해본 것 같아요. 어느 위치에 어떤 힘을 받느냐에 따라 몸을 쓰는 구동력 자체가 달라지더라고요.

채니의 ‘순간 이동’ 능력은 편집과 연결이 중요했을 것 같은데요. 현장에서는 직접 이동하느라, 꽤나 고생했을 것 같아요.
촬영할 때는 뿅 하면 잠깐 프레임 아웃 했다가 다시 뿅 하고 나오고, 장면적으로는 괜찮았지만 시간과 공은 많이 들어갔죠. 순간 이동을 했는데, 다음 장면은 몇 달 뒤에 찍기도 하니까, 몇 초 사이에 장면이 바뀌어도 그 모습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추가로 들어갔습니다. 저희는 어렵게 촬영했지만 보시는 분들은 가볍게, 쉽게, 재밌게 보시길 바라는 목표 하나로 즐겁게 촬영했습니다.
유인식 감독님과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이어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추셨어요. 유인식 감독님은 박은빈 배우의 ‘이색적인 설정을 돌파하는 힘’을 신뢰한다고 들었어요. 배우 입장에서 감독님은 어떤 존재인가요?
유인식 감독님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때 처음 겪고 나서 ‘정말 존경할 만한 분이시다’라는 것을 몸소 너무나 크게 느꼈고, 이런 분과 함께라면 배우로서의 부담감을 일부분 내려놓고 믿음으로 돌파해 나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감독님이랑 저랑 성향이 좀 비슷하지 않나 싶을 때가 많았어요. 그래서 아랫사람으로서, 저의 개인적인 고민들도 감독님께 ‘좋은 어른’에게 청하는 질문으로서 할 수 있게 되었죠. 유머러스하시면서도 구심력이 워낙 좋으시고, 아주 큰 포용을 통해 모두를 아우르시는, 제게는 등대 같았던 감독님이십니다.
후반작업 전까지는 결과물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작품이잖아요. 촬영장이 산만했을 법도 한데요. 배우들은 전체적인 톤을 다 인지하고 있었나요?
배우로서는 처음 경험해보는 현장이었습니다. 예전 〈스펀지〉에서 나온, 그런 초고속 카메라를 사용해 찍기도 했고요. 그런데 항상 유인식 감독님이 항상 설명을 잘 해주셨습니다. 이 작품은 특히 모든 파트의 사람들이 기량을 최대치로 발휘해야 완성될 수 있는 작품이었거든요. 특수효과팀, CG팀, 무술팀, 그리고 배우의 연기가 잘 협의되었고 모든 사람의 노고와 헌신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완성본을 보고 감독님께 ‘히어로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 〈원더풀스〉 배우 박은빈 인터뷰는 2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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