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루아침에 온 세상이 내게 손가락질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리고 그것에 대해 제대로 반박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그저 내 출신 배경만 보고 비난의 목소리가 쏟아진다면 버텨낼 수 있을까. 이런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을 실제로 겪고, 끝내 반론의 기회를 얻은 사람이 있다. 자이니치, 재일한국인 3세이자 인권운동가 신숙옥이 그 주인공이다.
11월 11일 개봉하는 〈호루몽〉은 〈카운터스〉로 2010년대 일본에 팽배하게 퍼졌던 혐오 시위 현장을 포착한 이일하 감독의 신작 다큐멘터리다. 그는 혐오 시위 반대 현장에서 만났던 신숙옥에게 단번에 매료됐고, 그의 인생과 당시 혐오 방송으로 타깃이 된 일을 담기로 했다. 그렇게 탄생한 영화 〈호루몽〉은 전주국제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를 비롯해 다양한 영화제에서 세계 관객들을 만나고, 오는 11월 11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개봉 전 처음으로 공식 일정을 통해 한국을 찾은 신숙옥과 영화를 만든 이일하 감독이 참석한 언론배급시사회와 기자간담회 현장을 전한다.

영화는 DHC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프로그램 〈뉴스여자〉가 오키나와 평화 운동에 참여한 신숙옥을 왜곡 보도했던 과정과 신숙옥의 법적 대응을 토대로 전개한다. 〈뉴스여자〉는 신숙옥이 자이니치이자 한때 조선학교를 다녔던 점 등을 들어 북한의 사주를 받았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그 현장에 취재조차 하지 않은 채 루머와 편견으로 전한 해당 보도로 신숙옥은 살해 협박을 받을 만큼 일본 우익들에게 공격받기 시작한다. 처음엔 독일로 피신했던 그는 마침내 DHC 텔레비전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기로 마음먹는다.
극영화와 달리 다큐멘터리는 보통 ‘다큐멘터리’라는 단어로 퉁치곤 하지만 다큐멘터리 또한 그 양식은 다양하다. 감독이 곧 목소리를 내며 구조를 주조하는가 하면, 반대로 아예 카메라 뒤로 빠져서 오로지 관찰만 하는 경우도 있다. 〈호루몽〉은 전체적으로 두 가지 양식의 적정선을 찾는 작품이다. 신숙옥과 DHC 텔레비전 간의 법적 소송을 중심으로 신숙옥의 일대기, 동시에 그의 가족까지 아우르며 자이니치의 역사까지 되짚는다. 그렇게 구조를 구성하면서도 작가(감독) 본인의 목소리나 의견은 전혀 넣지 않았다. 대신 이 작품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상징하는 순간들을 연출로 형상화한다. 예를 들어 이백란-케이코-신숙옥 이 삼대 모녀를 연상시키는 세 여성의 몸짓이나 도쿄타워 앞에서의 무용수와 소녀의 춤 등을 넣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이일하 감독은 〈호루몽〉이 다큐멘터리라는 본연의 기능으로 작동함과 동시에 신숙옥에게서 떼어놓을 수 없는 자이니치라는 요소까지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그런 점에서 〈호루몽〉은 약 90분가량의 분량으로 관객들을 매료시킨다. 신숙옥이나 자이니치의 지식이 전무했던 관객이라면, 자연스럽게 두 가지 요소에 호기심을 갖게끔 한다. 물론 어느 쪽이든 사전 지식이 있는 관객이라면 두 가지의 결합 외에 좀 더 깊이 있는 시선이 부재해서 다소 아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자이니치 100년사에도 관심이 저조했던 한국의 실정을 생각하면, 이 정도로 담백하게 핵심만 담은 것이 신숙옥과 자이니치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 데 적확해보인다. 특히 현재 신숙옥이 썼던 저서들이 절판돼 만나기 어려운 환경에서 〈호루몽〉은 그에 대해 알아가는 데 핵심적인 요소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날 〈호루몽〉 상영 직후 영화를 연출한 이일하 감독, 영화에 출연한 신숙옥 인권운동가가 참석한 기자간담회가 이어졌다. 이일하 감독은 “영화 공부로 일본에 유학하던 중 토론 프로그램에 나온 신숙옥 선생님의 모습을 봤다”면서 “유학생으로 힘든 와중에 그걸 보고 방에서 만세를 외쳤”던 순간을 떠올렸다. 이후 그는 〈카운터스〉를 촬영하는 현장에서 신숙옥을 처음 만났고, 법적 공방이 시작됐을 때 그에게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고 한다.
반면 신숙옥은 처음 다큐멘터리 얘기를 들었을 때 “하고 싶지 않았”단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 헤이트 스피치나 혐오 시위를 아무도 보도하려 하지 않을 때, 그 현장에서 양측의 모습을 모두 담는 이일하 감독의 모습을 모두 봐왔기에 자신의 후배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이일하 감독의 요청을 거절하면 “창피한 일”이라고 여겨져 수락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신숙옥은 자신이 이렇게 인권운동을 꾸준히 할 수 있는 힘에 대해 “한 가지는 한국의 근현대사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동학운동, 식민지 시대, 해방 이후 한국전쟁, 제주 4.3 항쟁, 광주민주화운동, IMF까지 “곤란한 상황이 다양하게 많았던 한국이 민주주의를 취득했다는 사실을 볼 때, 그것에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아야겠다 생각하며 나는 자이니치 조선인 신숙옥이다 말하며 살 것”이라고 말했다.

〈호루몽〉은 영화 개봉을 전후로 동명의 서적으로도 발간된다. 이 부분에 대해 이일하 감독은 “영화와 책은 전혀 다른 매체”라고 입을 열었다. 그는 “〈호루몽〉이란 영화가 정보가 정말 많은 영화인데, 그것보다 공감이나 감정의 습득을 녹여내려고 했다. 그렇지만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기에 어떻게 할까 하다가 관객들에게 소책자를 제공하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며 “그러다가 실제 책으로 내보면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고 그렇다면 소책자에서 정보의 질과 양을 높이면 되겠다 싶었다. 정보를 풍부하고 깊게 제공하자는 측면이 책에 담겼다”고 설명했다.
〈호루몽〉은 오는 11월 11일 극장에 개봉한다.



댓글 (0)
댓글 작성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로그인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