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굴〉에 이은 연상호 감독의 저예산 프로젝트가 다시 한번 통했다. 연상호 감독의 신작 〈실낙원〉이 지난 10월 21일 개봉해 관객을 만나고 있다. 〈실낙원〉은 9년 전 캠핑스쿨버스 실종 사건으로 아들을 잃은 엄마 류소영(김현주)에게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 류선우(배현성)가 기적처럼 살아 돌아오면서 시작되는 심리 스릴러다. 순제작비 약 5억 원의 저예산 영화임에도 개봉 첫 주말 10만 관객을 넘어섰고, 최근에는 누적 관객 15만 명을 돌파했다. 감독의 어머니가 쓴 글에서 출발해 AI로 되살린 아들과 9년 만에 돌아온 진짜 아들 사이에서 무너져 가는 엄마의 심연을 그리기까지, 〈실낙원〉의 비하인드를 정리했다.

# 연상호 감독 어머니의 글에서 시작된 이야기
연상호 감독은 토론토국제영화제 관객과의 대화에서 〈실낙원〉의 원안이 어머니가 직접 쓴 글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명절에 찾아온 아들에게 어머니가 연습장에 적은 세 페이지짜리 이야기를 내민 것이 시작이었다고. 원안은 마을에서 나쁜 짓을 하는 아들을 둔 엄마의 이야기였다고. 감독은 그 이야기를 어머니에게서 직접 구매해 소설 「블랙 인페르노」(오성은 작가)와 영화 〈실낙원〉으로 옮겼다. 연상호 감독은 〈실낙원〉을 두고 “어머니가 왜 이런 이야기를 썼을지를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 왜 제목이 ‘실낙원’일까
〈실낙원〉은 원안을 바탕으로 오성은 작가가 집필한 소설 「블랙 인페르노」를 원작으로 한다. 캐나다 접경 지역의 산간 마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은 사건을 쫓는 수사 라인의 비중이 컸는데, 연상호 감독은 무대를 한국으로 옮겨 각본을 다시 쓰면서 수사극의 외피를 덜어냈고, 그 자리를 류소영과 아들의 관계로 채웠다.
AI로 되살린 아들이라는 소재에도 분명한 의도가 담겼다. 감독은 “인공지능이 극도로 발전하는 시대에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깊게 생각했고, 그중에서도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심연을 탐구해 보고 싶었다”며 “기억 속에서 완벽해 보이는 아들과 예상과 너무나 다르게 자라 돌아온 진짜 아들 사이의 극단적 대비가 필요했다”고 밝혔다.
제목은 존 밀턴의 서사시 「실낙원」에서 가져왔다. 감독은 “낙원에서 쫓겨난 최초의 인류를 다룬 그 이야기처럼, 낙원을 잃는 것이 곧 인간 정체성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한 인간이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면서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된다는 점에서 이 제목을 붙였다”고 설명했다.

# 일부러 거리를 둔 모자, 김현주와 배현성
연상호 감독에게 류소영 역의 후보는 처음부터 오로지 김현주밖에 없었다. 감독은 류소영을 두고 너무 강하게 연기하면 작위적으로 보이고, 너무 힘을 빼면 관객이 눈치챌 수 없는 아주 어려운 역할이라며, 영화를 하면서 만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배우에게 맡기고 싶었다고 밝혔다.
9년 만에 돌아온 낯선 아들 류선우 역의 배현성은 〈지옥〉 시즌 2에서 김신록의 아들로 잠깐 특별출연한 인연으로 첫 영화 주연을 꿰찼다. 감독은 “한 회차 정도의 만남이었는데 몰입력이 뛰어났고 스태프나 다른 배우와 어울리는 태도도 인상적이었다”며 “류선우는 순수한 면과 서늘한 면을 모두 가진 미스터리한 인물이어야 했는데 배현성이라면 그 양가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며 “순식간에 서늘한 모습으로 돌변할 수 있는 연기력을 가진 배우”라고 평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건 두 배우가 모자 사이의 낯섦을 만들기 위해 현장에서 의도적으로 거리를 뒀다는 점이다. 각자 가진 것에서 조금 어긋나고 어색하게 가는 편이 오히려 더 사실적으로 보일 것이라는 판단이었다고 한다.

# 아날로그 질감으로 만든 ‘낙원의 아이들’
소영이 10살에 멈춘 아들을 만나는 AI 프로그램 ‘낙원의 아이들’은 최대한 감성적으로 구현됐다. 연상호 감독은 류소영이 놓지 못하는 추억이 실체화된 형태로, 안경형 가상현실 장치와 그것을 담은 상자까지 금속성 소재 대신 아날로그의 추억 같은 질감으로 만들었다. 가상 선우의 목소리에는 안경 뒤편의 골전도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듯한 사운드 효과를 입혀, 진짜 아들과 똑같은 모습이지만 가상이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일러주는 장치로 삼았다. 알록달록한 장난감으로 가득 찬 ‘낙원의 아이들’ 공간에는 미세한 글리치를 더해 따뜻해 보이지만 어딘가 서늘한 분위기를 완성했다.
가상 선우를 연기한 아역 배우 유지완에게도 “AI처럼 연기해 달라”는 디렉션은 없었다. 감독은 “가상현실 속 선우 역시 있는 그대로 느끼고 있고 오히려 더 인간적으로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그래야만 류소영이 느끼는 혼란이 강화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삼척 폐광과 파주 세트의 만남, 빈티지 렌즈로 빚어낸 무산시
〈실낙원〉의 배경 무산시는 극 중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도시다. 제작진은 쇠락한 소도시의 질감을 찾아 서울 곳곳과 경기, 강원 일대를 오가며 촬영했다. 트랜스 휴먼사와 무산시청, 경찰서 같은 공간은 실제 빌딩과 관공서를 활용했고, 무산시 전경은 드론으로 담아냈다.
이야기의 시발점이 되는 폐탄광은 류소영의 내면이 형상화된 공간이다. 탄광 외부는 강원 삼척의 도계광업소에서 촬영했고, 좁고 위험해 촬영이 불가능한 내부는 경기 파주 세트장에 따로 지었다. 미술팀은 비용 부담이 큰 암석 질감 대신 오래된 폐목과 흙으로 갱도를 디자인했고, 외부 로케이션에서 세트로 이어지는 백열전구 라인을 설치해 두 공간이 하나의 탄광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했다.
송현석 촬영감독은 현실적이지만 어딘가 어긋나 보이는 화면을 위해 자연스러운 색감과 낮은 콘트라스트가 특징인 니콘 빈티지 렌즈를 택했다. 카메라는 감정이 풍부한 소영에게는 가까이 다가가는 반면, 거리감 있는 선우는 한 발 떨어진 자리에서 차가운 빛 속에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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