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세계의 주인' 윤가은 감독 “이젠 단정하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하나의 사례, 하나의 얼굴은 그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 그 한 명의 인물을 드러내는 것에만 초점을 맞춰”

윤가은 감독 (사진 제공 =바른손이앤에이)
윤가은 감독 (사진 제공 =바른손이앤에이)

6년 만에 돌아온 윤가은 감독의 신작 〈세계의 주인〉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여전히 친숙하지만, 종종 낯선 순간을 마주하게 한다. 윤가은은 전작인 〈우리들〉(2016)과 〈우리집〉(2019)처럼 섬세한 시선으로 아이들의 작은 우주를 포착하는 익숙한 이야기로 우리를 끌어들이면서 동시에 이전 작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도를 한다. 여러 미스터리를 중첩하며 긴장감을 쌓아가는 전개로 기본적인 이야기 구조를 해체하고, 영화 이외의 여러 매체 감각을 영화에 끌고 오기도 한다. 이처럼 〈세계의 주인〉은 변화하는 세상에 맞춰 호흡하는 작가의 의식과 고민이 작가의 기존 세계관과 화합한 결과물이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세계의 주인〉이 윤가은 유니버스의 전환점이라 불리지 않을까. 윤가은 감독을 만나 내밀한 고민의 시간과 끈질기게 씨름하며 ‘주인의 세계’를 쌓아 올린 과정에 대해 들어보았다.


〈세계의 주인〉의 이주인(서수빈)
〈세계의 주인〉의 이주인(서수빈)

〈세계의 주인〉이 6년 만의 신작이에요. 작업 기간이 다소 길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준비하던 작품들이 있었는데 엎어지면서 공백 기간이 길어졌어요. 준비하다가 엎어지는 과정을 반복하다가 10대 여자아이들이 처음 겪는 성과 사랑, 연애 얘기를 다시 해볼까 싶었어요. 오랫동안 쓰고 싶었던 거니까 다시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 작업을 고민하는 동안 제가 계속 피해 가려고 했던 가장 리얼한 이야기, 어떤 폭력의 경험들이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거예요. 원래는 그런 것들을 밀어내면서 쓰려고 했는데, 결국에는 그것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결심이 섰고, 이야기를 다시 해체하고 재조립하면서 오래 걸린 것 같아요.

10대 여성 청소년의 성과 사랑에 관해서 얘기하고 싶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전의 인터뷰를 보니 그게 10년도 더 된 구상이었더라고요. 그럼 처음 이야기와 나중에 만들어진 이야기에서 가장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요? 폭력적인 내용을 더 반영했다고 말씀하시긴 했지만요.

사실 말해주신 그 지점이 가장 크게 변한 지점인 것 같고요. 이전의 버전도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는 비슷했어요. 아주 직관적이고 단순하고 자신의 몸으로 부딪치면서 연애의 감정을 몸으로 경험하고 그 마음을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인물로 구성했었어요. 그 인물이 하나의 사랑이 시작되고 끝나가는 과정을 통째로 경험하는 거죠. 근데 저와 관객들이 그 경험을 아이들의 예행연습처럼 보는 게 아니라 실제 그 기간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는 한 인간의 경험으로 관찰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이 이야기를 들여다보니까 특히 성적인 경험에 관해서는 사랑을 처음 마주할 때의 불안을 얘기하려고 했어요. 이것이 그 시기를 지나온 모든 여자아이의 공통적인 경험일 수도 있을 것 같았어요. 제가 오랫동안 하이틴 영화를 너무너무 좋아해서 한국판 하이틴을 만들고 싶었어요. 근데 판타지가 좀 제거된 그 시기를 마주한 아이들의 불안까지 녹여내는 아주 리얼한 연애물을 그리고 싶었던 것 같아요. 거기에 다른 주제가 더 들어오면서 조금 더 묵직하게 바뀌었지만, 자기 삶에 있어서 진짜로 연애를 경험하고 재발견해 나가는 아이들의 성과 사랑을 그린 이야기인 것 같아요.

〈세계의 주인〉
〈세계의 주인〉

영화의 오프닝에 관해서 물어보고 싶은데요. 암전된 상태에서 아이들의 소리만 들려오는 채로 시작하는데요. 바로 다음 장면이 주인과 찬우(김예창)의 키스신으로 이어지면서 당황스럽게 합니다. 이 장면을 영화의 시작점에 두신 감독님의 의도가 궁금해요.

이 영화에서는 이주인이라는 인물을 어떤 방식으로 소개하느냐가 너무 중요했어요. 그것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지금 이 순간 주인이 고민하고 있는 것을 전면에 드러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주인은 한창 연애에 열을 올리고 있는 친구이고, 좋아하는 남자 친구랑 성적인 경험을 해나가고 싶은데 그게 처음 하는 거라 익숙하지 않아서 삐걱거려요. 또 이 아이의 어떤 경험과 맞닿아서 잘 안되는 거일 수도 있죠. 어쨌든 그런 부분에 대한 주인의 고민을 들여다볼 수 있는 방향으로 이 아이를 소개하고 싶었어요. 동시에 이 영화의 앞부분에서는 일상적인 것들이 흘러가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시작점에서 관객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다가갈지 고민하다가 이런 장면이 나왔어요.

영화는 주인이 서명하지 않는 이유, 주인의 아빠가 따로 살게 된 이유, 쪽지를 보낸 사람 등등 여러 미스터리가 얽혀 있고, 이런 미스터리들이 긴장감을 만들어 내는 구성으로 흘러갑니다. 영화를 이렇게 구성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지금의 형태가 되기 전까지는 사건이 터지고, 그 사건을 해결해 가는 구조, 기승전결이 좀 더 뚜렷한 구조였거든요. 근데 결국 지금의 주제로 정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렇게 다시 쓰면서 그냥 이 이야기를 해체하자고 생각했어요. 기승전결을 신경 쓰지 말고 삶에 더 가깝게, 그게 지루하고 뻔해 보여도 주인의 일상을 집중적으로 생각하면서 구조를 먼저 짜는 게 아니라 장면을 먼저 생각했어요.

그 과정에서 인물의 일상이 먼저 나오는데, 나중에 인물과 그 인물의 일상을 다르게 보게 만들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겉모습에서부터 점점 그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게 하는 거죠. 그리고 영화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일상을 지루하지 않게 보여주는 방법으로 어떤 텐션과 미스터리를 안에 끌고 들어왔죠.

영화의 주요 미스터리 중에 쪽지가 기능하면서 영화 중후반부의 긴장감을 책임지고 있는데요. 쪽지의 기능에 관한 감독님의 의도를 자세히 듣고 싶어요.

그 쪽지에 글을 쓰는 게 제일 어려운 과정이었어요. 쪽지의 내용은 의도적으로 주인을 탓하고 있죠. 그리고 실제로 우리 사회 안에 있는 주인과 같은 인물에 대한 고정관념일 수도 있어요. 동시에 주인의 내면의 소리같이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는데요. 어느 날, 저희 촬영 감독님이 저와 콘티를 같이 만들다가 “근데 이 쪽지는 어떻게 보면 주인이 자문자답하며 해왔던 이야기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 얘기를 듣고 나서 쪽지에 적힌 글을 그런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게끔 고민했던 부분도 없지 않아 있어요.

〈세계의 주인〉
〈세계의 주인〉

성폭력이나 관련 트라우마에 관해서 자문을 구하기도 하고, 많이 연구하셨을 것 같은데, 그 과정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세요.

관련 다큐멘터리, 보도, 책, 논문, 사례집, 수기집 이런 건 닥치는 대로 읽고 공부했어요. 제가 나중에는 트라우마 연구에 관한 진짜 이해도 안 되는 의학 서적을 읽고 있더라고요. (웃음) 그래서 여기부터는 모르는 거라고 한계를 인식하게 됐어요. 관련해서 공부하면 할수록 트라우마의 스펙트럼이 너무 넓어서요. 그로 기인하는 고통도 각자가 자라온 환경에 따라서… 그러니까 당사자를 뒷받침해 주는 물적, 정신적 토대에 따라서 너무나 다른 양상으로 일어나거든요. 고통의 깊이도 감히 서로 비교할 수 없죠. 이런 것들을 끝없이 마주하는 순간이었어요.

그래서 이것을 내가 다룰 수 있는 걸까 생각하면 무서웠어요. 영화가 뭐라고 어떤 것에 대해서 대표한다고 할까. 그냥 그 지점을 버리자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수많은 사례 중 하나의 사례, 하나의 얼굴은 그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죠. 그 한 명의 인물을 드러내는 것에만 초점을 맞췄어요.

주인의 남동생인 해인(이재희)이 학예회 때 마술을 선보이기 위해 마술을 연습하잖아요. 계속 무언가를 감추는 마술을 연습하는데, 또 해인은 주인의 편지를 숨기기도 해요. 이 두 가지가 서로 연결되는데, 누나의 상처를 없애고 싶은 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신 건가요?

그렇죠. 해인이 극 중에서 10살 이 정도의 나이여서 그런 것을 인식해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고요. 다만 해인의 10년의 인생을 생각해 볼 때, 이 아이는 누나가 때때로 발작하면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엄마가 누나를 돌보기 위해서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을 거예요. 동시에 보통의 일상에서는 여느 누나처럼 자기를 챙기기도 하고, 장난스럽게 대하기도 하는 그런 누나와의 우정도 있었을 거란 말이죠. 그 와중에 아빠는 집을 나갔고, 또 집에서 말하면 안 되는 것들이 있는 거죠. 해인이 이런 것들을 경험하면서 누나가 어떤 상황인지에 대한 일말의 인지는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과정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건 의식하지 못한 차원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누나를 좀 보호해야 하는데 그런 막연한 생각으로 편지를 숨긴 거죠.

한편으로 마술은 다른 의미도 있는데요. 해인이 이 집에서 약간 관심 밖이잖아요. 집에서 다 예뻐하긴 하는데, 누나한테 너무 큰일이 있었다 보니 누나에게 집중이 돼 있죠. 누나가 화장실에서 오랫동안 나오지 않으면 밖에 나가서 볼일을 봐야 하는 그런 일을 계속 겪어온 거죠. 그런 상황 속에서 이 아이도 한 명의 인간으로서 관심과 애정을 받으려고 하죠. 가족의 관심을 어디서 받을 수 있을까 했을 때 마술이 있었던 것 같아요. 마술은 조금 이상한 거잖아요. 초자연적이고 신비로운 힘이고 그것을 쇼로 보여주는 것이고, 마술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 증명 같은 것을 하려는 마음이 결합된 거죠.

〈세계의 주인〉
〈세계의 주인〉

태권도 도장의 오대한 관장님(이대연)은 주인의 친아빠와 대비되게 참어른의 모습을 보여준 것 같아요. 이 캐릭터는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면 좋을까요?

주인과 같은 일을 겪은 당사자분들 곁에는 항상 좋은 어른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조사했을 때도 그랬고요. 알게 모르게 우리 사회는 계속 어두운 측면만 비추려고 하는 습성이 있는데, 사실 좋은 사람도 정말 많다고 느껴요. 그 어른 한 명만큼은 제대로 그리고 싶었어요. 주인이 선수가 될 것도 아닌데, 도장에 나가서 훈련하는 이유는 그냥 그 어른이 좋은 거예요. 묵묵히 있어 주는 심지어 남성인 그 존재의 어떤 것들을 다시 배우는 거죠. 다시 남성 어른에 대해서 재정립해 보는 거죠. 저는 그게 판타지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그런 어른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 사람들을 조명하는 게 이 영화를 만드는 제 역할이기도 한 것 같았어요.

극 중에서는 사과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면 좋을까요?

시나리오 단계에서 사과와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좀 있었어요. 말하자면 전사 같은 게 있었는데, 그것을 삭제하는 방향의 수정들이 이루어지면서 빠졌어요. 근데 이것을 완전히 없애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사과가 주인이라는 인물을 들여다볼 수 있는 어떤 열쇠처럼 작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예를 들면 주인에게 트라우마 때문에 트리거가 되는 상황들이 인생에 계속 생길 텐데, 사과가 뭔가 연결되어 있지 않았을까 이런 상상을 해볼 수도 있죠. 정확히 뭔지는 영화가 제시하지는 않지만요. 근데 사람들이 성범죄를 겪으면 성적인 상황이 발생할 때만 트리거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하죠. 물론 그것도 사실이지만, 자신이 겪은 맥락과 관계가 있는 무언가를 보고서도 트리거가 될 수도 있거든요. 그건 수많은 트라우마 연구에서 말하는 것이기도 해요. 그런 맥락에서 주인이 겪었던 어떤 일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 안에 사과가 놓여 있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사과라는 게 사실은 흔해서 피할 수 없는 거잖아요. 주인은 그 흔한 거를 매번 마주하면서 여기까지 온 거죠.

동시에 주인이 정말 사과를 싫어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여러 이유로 진짜 싫어할 수도 있는 건데, ‘쟤가 혹시 이것 때문에 그런 건가’라는 질문을 사람들이 막연하게 던지는 거죠. 그래서 저는 이 두 가지가 같이 작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윤가은 감독 (사진 제공 =바른손이앤에이)
윤가은 감독 (사진 제공 =바른손이앤에이)

이번 작품에서는 영화 이외의 매체 감각도 불러왔다고 생각하는데요. 아이들이 틱톡 영상을 찍는 장면과 같은 일부 장면은 틱톡의 감각을 불러오고, 웹툰을 화면 전면에서 보여주기도 하잖아요. 요즘 여러 영화가 이런 시도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감독님의 전작에서는 볼 수 없었는데, 이번 작품에서 이런 시도를 한 이유가 있을까요?

실제로 변화하고 있는 어떤 매체들에 대한 저의 감각이 증가해서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유튜브와 쇼츠를 많이 보거든요. 정말 다니면서 손에 스마트폰을 들지 않은 사람이 없잖아요. 요즘 초등학생들도 다 갖고 있으니까 영화보다 더 쉽고 편한 매체인 거죠. 그래서 저에게는 이게 위협으로 다가오기도 했어요. 이것이 삶에 너무 호흡하듯이 들어와 있어서 계속 같이 가야 한다는 생각을 최근 몇 년 동안 많이 했는데요. 동시에 이 영화는 청소년들이 중심에 서는 영화라서 더더욱 청소년의 문화가 들어와야 하는 거죠.

근데 제가 나이 차이가 좀 있으니까 이상하게 흉내 내지 않을까 불안했었어요.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게 매체의 속성을 그대로 가져오는 거였어요. 그리고 그 시기를 지나지 않은 배우들의 조언을 더 듣고 적극 활용했어요. 실제로 춤추는 영상은 배우가 직접 찍은 거예요. (주인의 친구 유라 역을 맡은 강채윤 배우가 촬영했다) 주인과 찬우가 데이트하는 몽타주는 청소년 연애 브이로그 영상을 많이 보면서 참고했어요.

한편으로는 두 번째 영화까지 만들고 나니까 제가 지금까지 영화를 찍어온 방식에 대한 고민이 좀 있었어요. 그때까지는 아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던 것 같아요. 저도 아직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익숙하지 않고 배워가는 과정에 있었으니까 기본을 잘하기도 벅찼어요. 그때는 일관된 톤 앤 매너를 만드는 게 훨씬 중요했거든요. 근데 계속 이렇게 만들다 보니 좀 균열을 내고 싶었어요. 하던 대로 익숙한 방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게 하는 게 아니라 좀 놀라게도 하고, 거칠고 이상하게, 낯선 게 침투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제가 그런 게 영화에 들어오는 걸 좋아하기도 했어요. 내 영화도 단정하지 않고, 어느 순간 확 전환되거나 좀 새로운 시도를 하는 영화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최대한 이상한 방식으로 새로운 것을 보여주려고 고민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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