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세기 일본 영화의 위대한 걸작으로 상찬 받은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영화 〈유레카〉가 5월 27일 국내 개봉한다. 본래 2000년에 세상으로 나온 〈유레카〉는 당시 제53회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하고, 하스미 시게히코와 같은 당대 최고의 평론가들에게 “그 어떤 걸작도 아직 이 영화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극찬을 받은 작품이다. 이번 첫 국내 개봉은 21세기 일본 영화가 도달한 최고의 성취를 목도하게 할 것으로 기대된다.
아오야마 신지 감독은 구로사와 기요시와 함께 상업 영화 제작 시스템과는 거리를 둔 창작을 지향하는 ‘릿쿄 뉴웨이브’를 이끈 대표적인 감독이다. 그는 평생 폭력의 기원과 남은 자들의 트라우마, 현대인의 고독을 깊이 탐구했다. 특히 자기 고향을 배경으로 한 기타큐슈 사가 3부작 〈헬프리스〉(1996), 〈유레카〉, 〈새드 베케이션〉(2007)으로 현대 일본 사회의 어둠과 인간 구원의 가능성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이번 작품 〈유레카〉는 영화의 황량한 세피아 톤으로 무너져 내린 일본 사회의 황폐화된 풍경을 시각화하며 일본 사회의 폭력의 순환을 다루고 있다.



후쿠오카의 한적한 어느 여름날, 시골 마을의 평화를 깨트리는 버스 납치 사건이 발생한다. 총으로 무장한 남자는 승객들을 하나둘 죽이고, 피로 얼룩진 현장에서 버스 기사 마코토(야쿠쇼 코지)와 초등학생 코즈에(미야자키 아오이), 중학생 나오키(미야자키 마사루) 남매 단 세 사람만 살아남는다. 각자의 방식으로 그날의 트라우마에 맞서며 살아가던 세 사람은 2년 후 마코토에 의해 다시 만난다. 가족에게서 심리적으로 고립된 마코토는 자신의 집을 나오고, 부모 없이 방치된 남매를 찾아가서 함께 살자고 말한다. 얼마 후 왕래가 없었던 남매의 사촌 아키히코(사이토 요이치로)마저 불쑥 찾아와 그들의 동거에 합류하면서 상처를 떠안은 이들의 삶의 의미를 되찾는 여정이 시작된다.
황폐화된 일본 사회가 야기한
폭력의 전이와 반복

〈유레카〉에서 폭력은 일상의 평범한 얼굴로 위장한 채 숨어 있다가 서서히 드러난다. 버스를 통째로 납치해서 승객들을 위협하고 살해한 납치범은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평범한 직장인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버스에 올라 어수룩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이윽고 사람들의 평온한 아침 일상을 깨트린 테러범으로 변한다. 또 코즈에와 나오키 남매의 아버지는 아내를 때려서 자신과 가족을 떠나게 만든다. 이후 그는 단순 교통사고인지 자살인지 모를 원인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면서 파괴된다. 〈유레카〉에서 폭력과 범죄의 사건은 일상과 구분되지 않는다. 이러한 영화의 세계는 1980-90년대 옴진리교의 유행으로 폭력성이 침윤되어 있는 당대 일본 사회의 공기를 환기한다.


1980년대에 만들어진 신흥 종교 옴진리교의 창궐은 일본의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전반까지 유행한 오컬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버블 경제의 후폭풍이 불어닥치기 전 1980년대의 일본은 급격한 경제 성장과 더불어 개인의 자산 가치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경제적인 풍요를 누렸다. 사람들은 마음껏 소비하는 소비 지상주의에 물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소비로는 채워지지 않는 정신적 만족을 욕망하면서 일상과 다른 세계에 끌리기 시작했다. 당대의 청년들은 현실의 풍요가 정신적 만족까지 메워주지는 못하자 일상을 벗어난 가상의 시공간을 동경하면서 초자연적 현상, 심령, UFO, 초능력, 즉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에 다가가려 했다. 옴진리교는 그러한 시대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고, 당대 청년들의 영적 갈망을 이용해서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경제적 풍요 속에서 되려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청년들의 영적 갈망은 기존의 자신을 부정하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강렬하게 품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는 〈유레카〉의 버스 납치극 시퀀스에서 잔혹한 학살을 자행한 테러범의 대사로도 드러난다. 경찰과의 대치 상황에서 그는 경찰의 눈을 속이기 위해 버스에서 함께 나온 마코토에게 “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의 말은 당시 옴진리교에 컬트적으로 매료되었던 청년들의 내면 심리를 반영하고, 테러범의 버스 납치극은 옴진리교의 신자들이 출근 시간대의 도쿄 지하철에 사린 가스를 살포하는 화학적 테러인 지하철 사린 사건(1995)을 연상케 한다.

1990년대의 일본은 버블경제 붕괴의 직격타를 맞았고, 한신 · 아와지 대지진(1995, 한국에서는 주로 고베 대지진이라고 부르지만, 일본에서는 한신 · 아와지 대지진이라고 부르는 편이다)과 옴진리교의 지하철 사린 가스 테러로 안전한 사회에서 위험한 사회로 변모하면서 겪게 된 사회적 위기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일본의 외적 붕괴는 일본인의 내적 붕괴로 이어진다. 해결 불가능한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페색감이 짙은 사회에서 사람들은 무력해지고 방황한다. 〈유레카〉의 빛바랜 세피아 톤은 사건 이후 트라우마가 집어삼킨 인물들의 공허한 내면과 동시에 해결 불가능한 문제들이 겹겹이 쌓이며 붕괴하는 일본의 황폐화된 풍경을 시각화한다.
※ 여기서부터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무너져가는 사회에서 발생하는 무력감과 폐색감의 고통은 폭력성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를 야기한다. 이는 사라지지 않고,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영화에서 버스 납치 사건의 생존자인 나오키는 남몰래 살인을 저지르면서 테러범과 아버지의 폭력을 반복한다. 나오키의 범죄 행위는 옴진리교 사건의 폭력성이 사회의 공기 입자로 녹아들어 당시 청년 세대에게 전이된 것을 드러낸다. 동시에 14세의 엽기적인 살인 행각인 고베 연속 아동 살상 사건(1997)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이기도 하다. 아오야마 신지 감독은 폭력의 전이와 반복을 영화의 상징적인 장면으로 나타낸다. 원가족에게서 심리적 안정을 찾지 못한 마코토는 집을 나가려 한다. 이때 그는 아버지가 미리 채비한 자전거를 타고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다가 남매의 집으로 향한다. 이 장면은 영화의 후반부에서 변형되어 반복된다. 나오키는 살인을 저지르려다 마코토에게 발각된다. 마코토는 나오키가 쥔 칼을 놓게 하고 강하게 다그친다. 그리고 그를 자전거에 태워 제자리를 맴돈다.

마코토의 아버지가 마코토에게 물려준 자전거는 이전의 세대가 남긴 해결되지 않은 문제와 짐을 상징한다. 마코토의 아버지는 일본의 경제 성장을 이륙한 세대이면서 동시에 급격한 고도성장 이후의 경제 불황을 남긴 은퇴한 단카이 세대(제2차 세계대전 직후 태어난 전후 세대)로 그려진다. 단카이 세대는 경제적인 풍요를 창출했지만, 그들이 일군 사회에서도 사회 구조적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경제 불황과 함께 다음 세대로 넘겨줬다. 사회적 시스템이 부재하고 붕괴한 사회는 폭력성을 야기하고, 다음 세대는 이러한 폭력과 트라우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빙글빙글 제자리를 맴돈다. 동시에 그럼에도 자전거를 끊임없이 타는 행위는 폭력이 반복되는 악순환, 출구 없는 고통 속에서 상처를 치유하고 나아가기 위한 강렬한 의지이기도 하다. 〈유레카〉는 집단적 트라우마를 겪은 일본 사회가 해결 불가능한 문제들의 출구 없는 미로 속에서 그럼에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질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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