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폭력 속에서 살아남은 사랑과 존엄의 풍경 '아임 스틸 히어'

문화기획자 하치


〈아임 스틸 히어〉 바우테르 살리스 감독
〈아임 스틸 히어〉 바우테르 살리스 감독

〈중앙역〉(1999), 〈모터사이클 다이어리〉(2004) 등을 연출한 거장 바우테르 살리스 감독이 10년 만에 신작 〈아임 스틸 히어〉(2024)로 돌아왔다. 8월 20일 개봉한 영화는 1970년대 브라질 군부 독재 아래 한 가족이 겪는 고난과 그 기억의 궤적을 따라간다. 주인공 유니스 파이바의 아들, 마르셀루 파이바가 쓴 동명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제작된 〈아임 스틸 히어〉는 역사와 기억이 개인의 삶 속에서 어떻게 체험되고 전승되는지를 기록하며, 억압의 시대가 남긴 집단적 상흔을 증언한다.


리우데자네이루에 드리운 빛과 그림자

〈아임 스틸 히어〉
〈아임 스틸 히어〉

영화는 1971년 리우데자네이루의 눈부신 햇살로 시작된다. 끝없이 이어지는 해변, 작열하는 태양, 검게 그을린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부딪히며 움직이는 건강한 육체들은 한순간, 낙원의 현현처럼 빛난다. 그러나 곧 군부 헬기의 굉음과 도시를 가로지르는 군용 트럭의 그림자가 그 평온을 위협하며, 시대가 강요하는 공포가 얼마나 손쉽게 일상을 균열 낼 수 있는지 암시한다.

그 속에서 유니스 파이바(페르난다 토레스)와 남편 루벤스 파이바(셀튼 멜로)는 다섯 아이와 함께 평범하지만 충만한 삶을 살아간다. 노래와 웃음, 친구들과의 교류가 넘치는 일상은 작은 공동체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증거처럼 보인다. 그러나 루벤스가 과거 국회의원이었다는 사실은 곧 위협의 씨앗이 된다. 군부 정권은 그를 표적 삼아 체포하고, 가족은 이유 없는 연행과 반복되는 조사, 끝내 행방불명이라는 비극의 소용돌이에 내던져진다.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건만 정부는 가짜 뉴스를 흘리며 루벤스의 존재를 지우고, 가족의 일상은 감시와 도청, 재산 동결로 잠식된다. 이제 남겨진 이들은 아버지의 공백을 인정하고 서로를 다독이며 삶을 살아내야 한다. 유니스는 결단을 한다. 집을 팔고 상파울루로 떠난 그는 홀로 다섯 자녀를 키우며 46세에 법대에 진학해 인권 변호사로 변모한다. 남편 실종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긴 싸움 또한 멈추지 않는다.


유니스의 재탄생 –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아임 스틸 히어〉
〈아임 스틸 히어〉

이 영화가 택하는 시선은 통상적인 군부 독재 서사에서 벗어난다. 대규모 시위나 폭력적 군사 작전의 익숙한 장면 대신, 영화는 방, 부엌, 앞바다와 같은 사적이고 일상적인 공간에 카메라를 고정하며 국가 폭력이 얼마나 쉽게 그리고 돌연히 개인의 삶과 친밀한 영역을 파괴할 수 있는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동시에 영화는 그 침범을 기록하는 데 머물지 않고, 상실과 폭력이 드리운 현실을 따뜻함과 존엄성으로 전환하는 미학적 품격을 보여준다. 사소한 대화와 웃음은 생존을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매일을 견디는 구체적 행위 속에 위치시킨다.

유니스의 삶은 이 점을 가장 선명하게 증언한다. 남편의 실종 이후에도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동네 아이스크림 가게를 찾고, 취재진의 카메라 앞에서 웃음을 잃지 않는다. 피해자다움을 강조하려 웃음을 거두라는 언론사 사진 기자의 요청에 유니스는 오히려 “스마일! 스마일!”이라 외치며 아이들에게 당당할 것을 요구한다. 유니스의 미소는 억지스러운 위장이나 방어적 제스처가 아닌, 고통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존재론적 표현이자 “살아남아야 한다”는 무언의 선언이다.

유니스의 궤적은 폭력과 상실의 역사 속에서 ‘생존’이란 단순한 생물학적 지속이 아니라 정치적 행위이자 실천적 저항임을 드러낸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흘러나온 웃음, 남편의 죽음을 확인한 순간에 번진 미소, 그리고 인권 변호사로 이어진 삶은 모두 단절되지 않은 연속선 위에 놓인다. 고통의 극한에서 오히려 존엄을 발현시키는 인간적 형상을 따라가며 영화는 질문한다. 인간을 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폭력은 현실이지만, 그것만이 삶을 규정하지는 않는다. 억압과 두려움은 이 가족의 삶의 의지와 품위를 꺾지 못 했다. 그렇게 사랑과 존엄의 풍경은 “아임 스틸 히어”라 선언하며 기억되고 전승된다.


연기와 실존이 만나는 순간

〈아임 스틸 히어〉 페르난다 몬테네그로
〈아임 스틸 히어〉 페르난다 몬테네그로

영화 후반부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장치는 노년의 유니스를 연기한 인물이다. 페르난다 토레스의 실제 어머니이자 브라질 연극계의 거장 페르난다 몬테네그로가 이 역할을 맡았다. 살리스 감독의 〈중앙역〉(1998)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던 95세의 몬테네그로가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노년의 유니스를 연기하며, 과거 남편의 얼굴을 TV 화면 속에서 알아보는 장면은 허구와 현실, 배우와 인물의 경계를 허문다. 이는 기억의 연속성과 전승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강렬한 장치로 작동하며, 동시에 유니스의 이야기가 군부 독재 시대를 살아낸 수많은 여성들의 초상으로 확장되는 경험을 선사한다.

여기에 살리스 감독의 개인적 경험이 더해져 영화의 배경은 한층 생생해진다. 그는 파이바 가족과 같은 동네에서 자라며 그들과 친구로 지냈고, 여러 인터뷰에서 당시 그들이 머물던 해변가 집을 선명히 회상한다. “창문은 열려 있었고, 문에는 열쇠가 없었는데,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면 매우 드문 일이었다”라는 기억처럼, 살리스는 그곳에서 자유롭게 정치와 사회를 토론하고 금지된 음악을 들으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바닷가 주택이 경찰에 급습당한 뒤 조용해진 모습 또한 감독에게 깊은 충격으로 남았다. 파이바 가족과의 교류는 군부 독재의 폭력을 다른 방식으로 체감하게 했고, 결국 영화 창작의 시발점이 되었다. 감독은 파이바 가족이 살던 집과 가장 흡사한 집을 찾아 소품 하나까지 세심하게 준비하고, 실존 인물과 유사한 아역 배우를 캐스팅하는 데만 1년을 투자해 다큐멘터리적 리얼리즘을 완성했다.


한국의 '계엄령의 기억'과 맞닿은 영화

〈아임 스틸 히어〉
〈아임 스틸 히어〉

〈아임 스틸 히어〉는 제81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각본상,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국제 장편영화상, 같은 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페르난다 토레스가 브라질 최초 여우주연상(드라마 부분)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계엄령의 기억〉으로 처음 소개된 바 있다. 브라질 군부 독재의 국가 폭력, 가족 해체, 그리고 치유의 여정은 최근 한국인들의 '계엄령의 기억'과 맞닿아 특별한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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