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8번 출구〉를 처음 봤을 때의 당혹감이 떠오른다. 디지몬 덕후인 나는 그날, 으레 그래왔듯이 〈디지몬 어드벤처〉(1999-2000)에서 쓰인 모리스 라벨의 불후의 명곡 ‘볼레로’(Boléro)를 들으며 극장에 갔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했을 때, 다시 ‘볼레로’를 마주하면서 우연의 일치에 놀라움을 느꼈다. 일정한 리듬으로 연주되는 스네어 드럼의 힘찬 소리가 들려올 땐, 두 귀를 의심하다가 플루트 독주가 흘러나오자 탄복하고 말았다. 원곡에서는 뒤이어 클라리넷, 바순, 오보에, 트럼펫, 색소폰 등의 악기가 순서대로 플루트 독주에서 선보인 두 개의 멜로디를 반복하지만, 영화는 곧바로 여러 악기가 오케스트레이션이 된 볼레로의 중후반부를 터트리며, 단숨에 나를 극 속으로 끌어들였다.

영화는 삶의 한 단면을 툭 뗀 듯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 중인 ‘헤매는 남자’(니노미야 카즈나리)는 음악을 들으며, 스마트폰의 화면 속 SNS를 훑어본다. 전쟁, 감염병, 유전자 변형으로 인한 돌연변이 쥐, 해일에 의한 피해 등 남자가 속한 세계 곳곳의 소식을 그는 그저 건조하게 바라볼 뿐이다. 이때, 아기의 울음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오고, 한 남자가 아이의 엄마에게 모욕적인 말들을 늘어놓으며 윽박지른다. 헤매는 남자는 소란이 일어난 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당황스러워하는 아이의 엄마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광경을 외면하는 다른 사람들까지도 보게 된다. 그 역시 관여하지 않고, 이어폰을 다시 귀에 꽂은 채 음악을 들으며 세계와 자신을 차단한다. 하지만 이 순간도 잠시, 헤어진 전 연인(고마츠 나나)에게 전화가 걸려 오고, 뜻밖의 소식을 듣는다. 둘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식을. 그리고 여자는 묻는다. “이제 어떡할 거야?”. 남자는 통신이 끊어지면서 여자의 물음에 답하지 못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무한루프의 지하도에 갇힌다.

헤매는 남자가 갇힌 무한루프의 지하도는 이상 현상을 발견하면 뒤로 돌아가고, 이상 현상이 없다면 앞으로 나아가서 8번 출구로 탈출하는 간단한 규칙을 따른다. ‘0’이 적힌 표지판을 보고 시작해 총 8번 같은 공간을 무사히 통과해야 빠져나갈 수 있다. 동명의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게임과 동일한 이 설정을 뚝심 있게 밀어붙인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흔히 마주하는 일상의 공간이었던 지하도는 폐쇄감을 불러일으키고, 반복되는 스테이지는 편집증적인 공포로 관객을 몰아넣는다. 그렇게 영화는 반복하고 변주하며 전개된다.

〈8번 출구〉의 반복과 변주는 음악 ‘볼레로’의 구성과 닮아 있다. ‘볼레로’는 17분 동안 단 두 개의 멜로디만을 반복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템포로 흘러간다. (라벨이 원래 의도한 템포대로 연주하면 17분이지만, 현대에서는 주로 템포를 조금 빨리 해서 16분 내외로 연주된다. 우리가 익히 아는 ‘볼레로’는 후자다.) ‘볼레로’는 1분 남짓한 시간 동안 진행되는 두 개의 주제(곡 전체에 걸쳐 반복하거나 변주되는 핵심 멜로디)를 총 17번 반복하는 독특한 구성을 지닌 것이다. 반복되는 리듬과 멜로디의 곡에서 점층적인 변화를 끌어내는 것은 라벨의 특출한 능력으로 유명한 악기 편성이다. 첫 멜로디를 플루트가 연주하고, 클라리넷, 바순, 오보에 등이 이어받는다. 이후 여러 악기가 더해지면서 곡 속에서 점층적인 변화를 만들어낸다. 이는 같은 스테이지에서 이상 현상이 일어나는 영화의 구성과도 맞닿아 있다. 또 영화 속 지하도에 해일이 덮쳐오며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끌어내는 설정은 볼레로에서 곡 후반부에 이르러 모든 악기가 동원돼 카타르시스를 자아내는 구성과 이어진다. ‘볼레로’와 〈8번 출구〉는 영화 속에서도 등장한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의 착시화처럼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볼레로’의 점층적인 구성은 〈8번 출구〉의 주제 의식과도 공명한다. 영화는 헤매는 남자가 지하도에 갇힌 이유를 이상 현상을 통해 점층적으로 제시한다. 남자는 반복되는 스테이지에서 전 연인의 연락을 다시 받고, 지하도에서 열린 문을 통해 타인의 곤경을 외면한 자신을 다시 마주한다. 그리고 SNS에서 보았던 돌연변이 쥐와 해일을 지하도에서 다시 목격하고, 해일에 의해 침수된 지하도 속에서 아이를 구하러 갈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이는 모두 남자의 책임과 연결되며, 그가 지하도에 갇힌 이유다. 남자의 아이에 얽힌 책임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끝나지 않고, 사회적 책임, 전 지구적인 문제에 대한 책임으로 확장된다. SNS를 통해 자신이 속한 세계의 일을 건조하게 보는 남자의 모습은 개인이 발 디딘 곳, 지역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타인의 세계를 살피지 못하는 현대인의 모습과 같다. 영화 속 지하도는 남자의 죄책감과 내내 회피하며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한 불안이 투사된 ‘연옥’이자 전쟁, 기후 위기, 생태계의 위기 등 현대의 여러 문제가 도사리는 세계의 축소판이다.

그 축소판 속에서 소년, 청년(헤매는 남자), 장년(걷는 남자)의 인물들은 인류를 대표하며, 헤매는 남자와 걷는 남자(코치 야마토)는 각각 모든 것이 불확실한 현대와 앞만 보고 나아가는 근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근대의 맹목적 발전은 세계와 후대를 구해내지 못했고, 이 책임은 현대로 넘어왔다. 그리고 영화의 끝에서 ‘볼레로’가 다시 흘러나온다. 남자는 또다시 지하철에서 타인의 곤경을 마주한다. 이제 이 남자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지금의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볼레로’가 반복되는 현실의 구속에서 예술이 이뤄낸 해방이라면, 〈8번 출구〉는 전 지구적 문제가 당면한 현대에서 길을 잃은 현대인에게 바치는 더없이 강렬한 우화다. 밀려오는 뭉클함을 안고 이제 그만 나가야 겠다. 8번 출구로.
***** 영화 속 물건들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 ‘주성철의 사물함’을 시작으로 떡상을 기대하는 배우 사용 설명서 ‘김지연의 보석함’, 내 마음을 움직인 영화음악 감상실 ‘추아영의 오르골’, 서브컬처 잡상인의 구매일지 ‘성찬얼의 만화책’까지 씨네플레이 기자들이 저마다의 취향과 시선으로 격주 연재를 시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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