벡델데이가 필요 없는 그날까지! '정년이' '빅토리' '하이파이브' 등을 만든 벡델리안과의 만남, 벡델데이 2025 현장

 '벡델데이 2025’ 공식 포스터
'벡델데이 2025’ 공식 포스터

소멸을 목표로 탄생한 축제가 있다. 벡델데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없어지는 것’을 목표로 시작된 행사다. 성평등의 가치를 실현한 작품들이 보편화되는 그날까지, ‘벡델데이’는 한국 영화영상 미디어에서의 성평등 재현을 돌아보기 위해 마련되었다. 한국영화감독조합(DGK)에서 주최·주관하는 벡델데이는 2020년에 시작되어 올해로 6회째를 맞아, KU시네마테크에서 9월 6일부터 7일까지 양일간 개최됐다.

벡델데이2025 벡델토크 이미지
벡델데이2025 벡델토크 이미지

올해 벡델데이 2025에는 스페셜 토크, 특별 상영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 가운데, 6일 오후 1시 KU시네마테크에서는 벡델데이 2025의 문을 여는 첫 코너로 ‘벡델리안과의 만남’이 진행됐다. 아쉽게 현장에 참석하지 못한 〈미지의 서울〉의 박보영 배우는 영상을 통해 “미래와 미지는 본인의 주체적인 선택으로 성장해 가는 캐릭터이기에, 마음이 많이 끌렸다. 많은 사랑을 보내주신 덕분에 수상을 할 수 있었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옥씨부인전〉의 박지숙 작가는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고, 용기를 주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이번 벡델리안 선정으로 그 마음을 조금은 인정받은 것 같아 감사할 따름이다”라고 서면으로 수상소감을 전했다.

'벡델리안과의 만남' 참석자. (사진제공=@bechdelday 인스타그램)
'벡델리안과의 만남' 참석자. (사진제공=@bechdelday 인스타그램)

올해 ‘벡델리안과의 만남’은 ‘장르의 서사에서 자신의 지분을 확보한 여성 캐릭터’라는 주제로, 영화 부문 ‘벡델리안’에 선정된 〈딸에 대하여〉 이미랑 감독, 〈빅토리〉 〈하이파이브〉 이안나 제작자, 〈최소한의 선의〉 김수연 작가와 시리즈 부문 ‘벡델리안’에 선정된 〈정년이〉 정지인 감독, 〈정숙한 세일즈〉 신혜미 제작자가 참여하고 이화정 벡델데이 프로그래머가 모더레이터로 함께 했다. 이날 현장에서 올해의 벡델리안들이 관객들과 나눈 이야기를 전한다.

'벡델리안과의 만남' 현장. (사진=씨네플레이)
'벡델리안과의 만남' 현장. (사진=씨네플레이)

〈딸에 대하여〉 (출처=아토)
〈딸에 대하여〉 (출처=아토)

“스테레오타입은 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사라지는 것, 그 작업은 창작자의 몫”

영화 부문 벡델리안 감독상 〈딸에 대하여〉 이미랑 감독

〈딸에 대하여〉를 연출해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오민애), CGV상, 제49회 서울독립영화제 CGK촬영상, 장편 관객상 등 숱한 상을 수상한 이미랑 감독은 “벡델리안 선정은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딸에 대하여〉를 만들 때, 벡델테스트를 스스로 체크를 해봤다. 그래서, 이 상을 기다렸다면 기다렸다”라며 이번 수상에 대한 소감을 전했다.

〈딸에 대하여〉는 ‘엄마’의 시각으로 차별이 가득한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영화다. “〈딸에 대하여〉는 ‘우리에 대하여’라고 찍어야겠다고 생각한 영화다. 영화 속 어느 한 캐릭터, 어느 한 서사도 우리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 없다”라며 〈딸에 대하여〉의 주인공들이 비단 ‘소수자’라는 정체성에만 갇히지 않게 된 배경을 전했다. 이미랑 감독은 “스테레오타입이란, 실은 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사라진다. 겉으로 볼 때는 우리 누구나 비슷해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뚜껑을 열어보면 아주 다른 내용물이 들어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다 다른 개별성,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캐릭터도 그렇다. ‘엄마’라고 했을 때, 우리가 떠올리는 인상이 있는데, 그 사람의 히스토리를 세부적으로 보면 면밀하게 달라진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이미랑 감독은 “그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작업을 창작자가 해야 한다”라며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난 캐릭터와 서사, 연출을 고민해야만 하는 창작자의 의무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면서도 이미랑 감독은 “이야기의 힘이 중요하다고 말씀을 드리긴 했지만, 어떤 캐릭터를 상상할 때, ‘꼭 이 성별이어야 해?’라는 식의 견제는 필요한 것 같다. 나의 얘기인데, 〈딸에 대하여〉의 ‘권 과장’이 꼭 남성이었어야 했을까. 내가 남성이 가지고 있는 관리자로서의 스테레오타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라며 자기반성과 함께 벡델데이, 그리고 벡델테스트의 의의에 대해 전했다.


〈최소한의 선의〉
〈최소한의 선의〉

“임신한 학생이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게 하고 싶었다”

영화 부문 벡델리안 작가상 〈최소한의 선의〉 김수연 작가

영화 〈최소한의 선의〉는 난임을 겪는 교사와 임신을 한 학생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학생 임신’이라는 소재의 극에서 익히 보던 서사와는 사뭇 다른 길을 간다. 〈최소한의 선의〉는 임신한 학생과 선생, 사제지간을 통해 서로 다른 세대와 입장의 차이를 극복하고 교감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린다.

영화 부문 벡델리안으로 선정된 김수연 작가는 “작은 영화라 묻힐 수도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최소한의 선의〉가 스크린에서 다시 한번 상영될 기회를 가지게 되어 기쁘다”라며 자신이 참여한 영화의 재조명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김수연 작가는 〈최소한의 선의〉를 집필하게 된 과정에 대해 “보통은 학생이 임신했다고 하면, 부정적인 시선에서 출발할 것이다. 나부터 그렇다. 그래서 나를 설득해가는 과정에 ‘희연’(장윤주)이 있었다. 끊임없이 학생과 선생님 사이에서, 선생님을 시험에 들게 하며 글을 전개시키려고 했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학생 임신 사례를) 간접적으로 취재했을 때, 자신의 권리, 의사를 당당하게 얘기하는 학생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목소리를 내는 학생, 그리고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해 나가며 성장하는 아이를 그리고 싶었다”라고 말하며, ‘임신한 10대 여학생’의 전형을 비튼 이유에 대해서 전했다.

한편, 김수연 작가는 작가를 지망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두려움 없이, 쓸데없는 생각을 마음껏 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 작가라면, 그것은 의무다”라고 말하며 응원의 한 마디를 건넸다.


〈빅토리〉
〈빅토리〉
〈하이파이브〉
〈하이파이브〉

“언젠간 〈에린 브로코비치〉와 같은 영화를 만드는 게 꿈”

영화 부문 벡델리안 제작자상 〈빅토리〉 〈하이파이브〉 이안나 제작자

안나푸르나필름 이안나 대표는 치어리딩이라는 단체 활동을 통해 더 나은 환경을 위해 응원하는 긍정적인 여성들의 연대를 보여준 〈빅토리〉, 그리고 10대 히어로, ‘야쿠르트 아줌마’로 슈퍼히어로물에 성별과 나이의 장벽을 허문 〈하이파이브〉로 영화 부문 제작자상에 이름을 올렸다.

유독 다수의 여성 주인공,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제작하는 데에 대해 이안나 대표는 “평범한 사람의 작은 성장 이야기를 그리려다 보니 여성 캐릭터를 만들게 됐다. 나의 초창기 필모그래피가 〈과속스캔들〉과 〈써니〉인데, 〈과속스캔들〉 박보영 배우의 캐릭터, 그리고 〈써니〉의 7명의 성장 등을 만들다 보니 거기서 재미를 느꼈기 때문 아닐까” 하고 그 이유를 추측했다. 그러면서도 “〈빅토리〉는 내가 만들면서도 응원을 받았고, 〈하이파이브〉 역시도 개봉하면서 내가 초능력을 받은 것처럼 많은 힘을 얻었다”라며 “다양한 관객들이, 다양한 시선으로, 내 이야기처럼 공감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캐릭터가 무엇을 대변할 수 있을지, 관객들에게 어떤 공감의 요소를 줄지” 고민한다며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을 설정한다고 밝혔다.

이안나 대표는 이 자리에서 제작자 생활의 큰 목표를 공개하기도 했다. 이 대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에린 브로코비치〉(2000)다. 내가 끝까지 영화를 만들 때까지, 꼭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목표가 있다. 다음 영화는 아닐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꼭, 그런 여성의 성장, 성공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다”라고 전했다.


〈정년이〉
〈정년이〉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사회의 ‘소년만화’ 같은 〈정년이〉”

시리즈 부문 벡델리안 감독상 〈정년이〉 정지인 감독

정지인 감독은 2022년 〈옷소매 붉은 끝동〉으로 시리즈 부문 벡델리안 감독상에 선정된 데 이어 〈정년이〉로 두 번째로 벡델리안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정지인 감독은 “나는 입봉했던 순간부터 늘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을 해왔다. 특별히 여성 서사 작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늘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을 해왔다”라며 유달리 벡델데이와 인연이 깊은 이유에 관해 설명했다.

정지인 감독이 연출한 〈정년이〉는 1950년대 여성 국극단에서 활동하던 여성 정년이의 성장사를 보여준 작품으로, 잊혔던 ‘여성 국극’이라는 장르를 다시금 조명한 작품이다. 정지인 감독은 “〈정년이〉를 연출하며 모델로 삼았던 건 〈대장금〉 속 장금이와 동료들의 관계였다”라며 〈정년이〉를 “여성들의 사회 속에서, 어떤 한 가지의 목표에 정진해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한 줄로 정의했다. 그러면서도, 정 감독은 “그런 서사를 따르다 보니, 흔히 남성 캐릭터로만 이루어졌던 소년만화에서 나오는 공식과 같아지겠다는 생각도 했다”라며 남성들의 것으로만 여겨졌던 목표와 성취에 대한 서사를 여성 출연진들로만 이루어진 〈정년이〉로 실현한 소감을 전했다.

더불어, 정 감독은 흔히 여성들 간의 관계에서 묘사되던 시기, 질투의 공식에서 벗어나니, 보다 다양한 관계들을 내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음을 밝혔다. 정 감독은 “시기와 질투로만 관계 형성을 하면 당연히 재미가 없다. 여성 캐릭터들이 어떤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서로를 선망하기도 하고 라이벌로 생각하기도 하고, 싫어하는 부분들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있어왔던 관계를 그려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드라마 속에서 늘 있어왔지만, 남성 캐릭터나 다른 요소 때문에 시기나 질투로 표현이 됐던 건 아닐까” 하는 질문을 던졌다.


〈정숙한 세일즈〉
〈정숙한 세일즈〉

“제작자로서 해서는 안 될 선택들의 연속인 〈정숙한 세일즈〉,

그럼에도 뚝심 있는 이야기들이 필요하다. 파는 건 우리의 몫”

시리즈 부문 벡델리안 제작자상 〈정숙한 세일즈〉 신혜미 대표

〈정숙한 세일즈〉는 '성(性)'이 금기시되던 그때 그 시절인 1992년 한 시골마을, 성인용품 방문 판매에 뛰어든 '방판 시스터즈' 4인방의 자립, 성장, 우정에 관한 드라마로, 시놉시스만 봐도 벌써 편성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짐작이 가는 작품이다. 실제로, 〈정숙한 세일즈〉를 제작하며 ‘예상할 수 있는 모든 허들’을 전부 겪었다는 신혜미 대표는 “19금 소재, 시대극, 여성 중년 멀티캐스팅 등, 사실 제작자로서 하면 안 될 모든 선택을 한 작품이다. 그래서 후회한 적도 있었는데, 벡델리안에 선정되어 이제는 다시 무모한 작품을 많이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벡델리안으로 선정을 해주신 건, 용기를 조금 더 내보라는 얘기인 것 같다”라며 벡델리안으로 선정된 데에 기쁨을 표했다.

〈정숙한 세일즈〉는 그 모든 자극적인 소재를 사용했음에도 발랄하고 경쾌한 톤이 인상적인 코미디 드라마다. 신 대표는 “소재가 마이너하기 때문에, 드라마까지 마이너해지면 사람들이 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 귀엽고, 사랑스럽고, 휴머니즘이 가득한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다. 사실, 시대와 무지가 빌런이지, 주인공들 중에 빌런은 없다. 그래서 귀엽게 봐주신 게 아닌가 싶다”라고 드라마가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추측했다. 그러면서도 “〈정숙한 세일즈〉의 정숙이를 비롯한 주인공들과 제작진의 경험이 비슷했다. 세상은 만만치 않았지만, 그랬기 때문에 우리끼리 연대할 수 있었다”라며 녹록지 않았던 현실에 대해 언급했다.

한편, 신혜미 대표는 현실과 타협해야 할지 고민하는 수많은 창작자들을 향해 “이야기를 만들 때, 제일 코어는 ‘이 이야기가 과연 재미있냐?’다. 우리가 매일 하는 말은 ‘왜 시장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냐, 재미있는 게 중요하다’이다. 그냥 뚝심 있게 밀고 나가시라. 파는 건 우리가 하겠다”라며 박수갈채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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