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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희 평론가의 '암살자(들)', “펜으로, 몸으로, 그리고 음악으로” ②

〈암살자(들)〉은 그렇게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밝히지 않으면, 언제 밝힐 것인가.

※ 〈암살자(들)〉 리뷰는 1부에서 이어집니다.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택시를 멈춘 순간

도쿄에서 영일을 맞이한 사람은 극동그룹 지사의 재일교포 직원 이강자다. 처음에는 그녀를 귀찮아하던 영일도 곧 그녀의 통역에 기대어 취재를 이어간다. 큰형에게는 ‘이세탄에서 쇼핑 중’이라고 둘러대겠다는 이강자와 함께 오사카로 내려가 문태광의 자취를 좇고, 마침내 문태광이 처음부터 혼자가 아니었음을 알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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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다. 능숙하게 다가와 넉넉한 돈과 다정함, 인정의 말과 새로운 사상을 건넨 사람. 한국에 가서도 모든 것을 돌봐주겠다고 약속하고, 서울에서는 명동의 고급 구두를 두 켤레 사 함께 나눠 신은 사람이다. ‘피는 뜨거운데 현실은 차가워서’ 급진적 사상에 경도되었지만 일용직으로 살아가던 문태광에게, 마에다는 새로운 삶과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는 환상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다정하게 나란히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외로운 한 젊은이를 테러리스트로 만든 것은 협박보다 다정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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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진실을 쥔 영일은 중앙정보부의 습격을 받는다. 이강자의 마지막 전화 덕에 공항으로 빠져나갈 수도 있었지만, 승합차에 실려 가는 그녀를 본 순간 택시를 멈춘다. 특권이 마련한 탈출로를 등지고 온몸으로 승합차를 막아선다. 오른손이 부러진 채로도 끝까지 그녀를 지킨다. 남부러울 것 없는 특권을 누리며 진실에 다가가던 영일은, 처음으로 가진 것이 통하지 않는 자리에서 몸으로 값을 치른다. 국가폭력의 무게를 몸으로 받아내는 자리, 재환이 먼저 트럭에서 내던져졌던 바로 그 자리에 영일도 부러진 손을 하고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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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잃은 자리

영일은 오른손을 크게 다쳐 더 이상 타자기를 칠 수도, 수첩 위에 만년필을 빠르게 흘려 쓸 수도 없다. 권력은 기록하는 손을 부러뜨리거나 타자기를 망가뜨리면 기록도 멈출 것이라 믿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른손을 잃은 영일은 마지막 투쟁의 최전선에서 몸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며 바리케이드를 쌓는다. 아수라장이 된 현장에서, 구둣발과 몽둥이가 난무하는 와중에 책상 위에 올라가 끝까지 카메라의 셔터를 깁스를 한 손으로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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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언론실천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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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환이 써낸 문장은 선언이 되고, 영일은 그 문장을 몸으로 행한다. 모래로 망가진 타자기 옆의 펜과, 부러진 손 대신 앞으로 나선 몸. 기록과 실천이 만나는 순간 하나의 선언이 완성된다. 그렇게 진실을 추적하던 이들의 뜨거운 심장이 모인다. 구둣발에 짓밟히면서도 선언문을 끝까지 낭독한 재환은 다시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간다. 이번에는 핏자국 묻은 붕대로 눈이 가려졌고, 곁에는 철구가 있다. 펜을 든 사람과 정복을 다려 입었던 사람이 같은 트럭에 실려 간다.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그물처럼 쳐진 틈 사이로 새어 드는 한 줌의 빛뿐이다. 진실은 온전히 보이지 않고 길도 알 수 없으나 그물에는 틈이 있고, 그 틈으로 빛이 든다. 질문이란 권력이 촘촘히 짜놓은 설명의 그물에 갇히지 않고, 그 틈으로 들어오는 것을 끝까지 응시하는 일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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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뒤

영화는 1989년으로 건너뛴다. 텔레비전에서 청문회가 생중계되고, 1974년 당시 현장 감식을 맡았던 감식계장이 증인으로 나선다. 그는 현장에서 찍었으나 끝내 세상에 꺼내지 못했던 사진을 내밀며 영부인을 관통한 탄환에 대해 말한다. 안경을 밀어 올리는 손이 떨리고, 1974년의 수사본부장은 그를 향해 빨갱이라고 소리친다. 15년 전 회의실의 빨간 펜이 헤드라인을 지웠다면, 이제는 빨간 낙인이 증인을 지우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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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청문회를 재환이 지켜본다. 곁에는 영일이 있다. 편집국 천장의 팻말은 한자 ‘社會部’에서 한글 ‘사회부’로 바뀌었고, 동료들은 조금씩 늙었다. 배경이 달라진 것을 보면 한글과 가로쓰기를 가장 먼저 시작한 새로운 신문사로 자리를 옮겼을지 모른다.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여전히 기자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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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철구는 아파트 경비실에서 같은 청문회를 본다. 그는 끝내 경찰로 돌아가지 못했다. 다려 입은 정복으로 문태광에게 끝까지 진실을 요구했던 사람, 붉은 암실 속에서만 속삭이듯 조용히 이야기를 꺼내던 감식계장의 설명을 듣던 그가, 이제 경비실의 작은 화면 앞에서 그날의 진실이 마침내 말해지는 것을 지켜본다. 영화는 이 비대칭을 감추지 않는다. 진실이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서, 그것을 위해 대가를 치른 모든 사람이 제자리를 되찾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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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성으로 증명되는 것

〈암살자(들)〉은 말하려는 것을 언제나 은유 뒤에 숨기는 영화는 아니다. 때로 정서적 톤이 극의 엄중함과 부딪히고, 인물들이 자신의 신념을 지나치게 또렷하게 발음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한 결점으로만 여기고 싶지 않다. 어떤 시대에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조차 하나의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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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추구하는 일은 뜨거운 심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영화가 보여주는 뜨거움은 쉽게 타오르는 열정과는 다르다. 흙비탈에 내던져진 뒤에도 다시 취재하는 것. 타자기가 멈춰도 펜을 들어 쓰는 것. 손이 부러져도 온몸으로 나서는 것. 파면당한 뒤에도 제복을 다려 입고 묻는 것. 그리고 세상에 꺼내지 못한 사진을 15년 동안 간직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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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의 뜨거움은 온도가 아니라 지속성으로 증명된다. 〈암살자(들)〉의 에필로그는 그 문장의 증명이다. 진실을 묻고 요구하는 일이 제대로 보상받는다는 보장은 없다. 트럭에 실려 가고, 손이 부러지고, 제복을 잃는다. 그래도 이들은 끝까지 계속 묻는다. 손익계산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행위다. 세 사람 모두 타고난 투사도, 거대한 사상에 사로잡힌 혁명가도 아니다. 그저 각자의 직업윤리에 끝까지 충실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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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는 『반항하는 인간』에서 반항의 출발을 거대한 이념이 아니라, 여기까지는 넘어올 수 없다는 한 사람 안의 한계선에서 찾는다. 평생 명령에 따르던 사람이 어느 순간 ‘아니오’라고 말할 때, 그 거절은 동시에 내 안에 짓밟혀서는 안 될 무언가가 있다는 긍정이 된다. 재환과 철구와 영일의 저항도 그렇다. 견디고 또 견디다가 더 넘어갈 수 없는 선 앞에서 멈춰 선다. 빠른 호흡 속에서 자칫 지나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내면의 작은 균열이 시작되는 순간들이다. 영화음악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는다. 일렉트릭 기타와 바순, 플루트와 피아노는 감정을 대신 설명하기보다 마음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기울어지는 순간을 조용히 밀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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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위대해지라고, 끝까지 진실을 향해 나아가라고 속삭인 사람은 없었다. 그 속삭임에 현혹된 것은 오히려 총을 든 문태광이었다. 마에다가 건넨 돈과 다정함, 거대한 사상은 인정과 교류에 목말랐던 외로운 사람을 남이 써준 대본 속 도구로 만든다. 그의 몸이 그 사실을 먼저 말한다. 영화 후반부 내내 문태광은 속이 빈 사람처럼 휘적휘적 걷고, 눈빛에는 초점이 없다. 철구가 진실을 말해달라며 절규해도 반응하지 않던 그가 단 한 번 살아나는 순간이 있다. 모든 선고가 끝난 뒤 마에다를 발견했을 때다. 텅 비었던 눈이 반짝이고, 그는 비로소 살아 있는 사람처럼 돌아온다. 진실을 묻는 목소리에는 반응하지 않던 눈이, 다른 이름으로 다가와 그에게 거사의 영웅이라는 배역을 쥐여준 사람의 얼굴 앞에서만 빛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서늘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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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손의 클로즈업이 많은 〈암살자(들)〉은 두 종류의 행동을 나란히 놓는다. 밖에서 주입된 위대함에 움직이는 손과, 안쪽의 작은 균열에서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손. 선언은 후자의 손에서, ‘뜨거운 심장을 모아’ 펜을 통해 태어난다. 이 영화가 끝까지 추적한 진실은 하나의 정해진 결론이라기보다 인간이 취하는 태도, 곧 선택의 자세에 가깝다. 거대한 신념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지만, 어떤 순간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지는 누구에게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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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 감독은 암살 사건의 진실을 완벽하게 복원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영화가 팩션임을 거듭 밝히고, 실제 기록과 영화적 상상의 경계를 드러낸다. 오히려 그 때문에 더 정직한 일을 한다. 역사 속에서 흐릿해진 질문들을 다시 질문의 형태로 돌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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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수사본부 기자회견장에서 재환이 끝내 견디지 못하고 외친 말이 있다. ‘지금 밝히지 않으면.’ 영화는 그 문장의 뒷부분을 굳이 발음하지 않는다. 그저 두 번 반복한다. 지금 밝히지 않으면 이대로 사실이 된다. 오늘의 왜곡은 내일의 신문기사가 되고, 얼마 뒤 공식기록이 되며, 충분히 오래 지나면 역사가 된다. 무려 15년이 걸렸다. 그동안 질문이 사라지지 않았기에, 생중계되는 화면 위로 말해지지 못했던 것들과 드러낼 수 없었던 것들이 돌아올 수 있었다. 〈암살자(들)〉은 그렇게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밝히지 않으면, 언제 밝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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