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아영의 오르골] 사랑의 행로를 따라가는 '파반느'의 음악들

나는 영화 속 음악에 꽂힌다. 음악은 때때로 보이는 이미지와 들리는 대사만으로는 다 전할 수 없는 인물의 내밀한 감정을 들려준다. 창작자의 숨은 의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구가 되기도 한다. 내게 영화 음악을 이해하는 것은 영화에 가닿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추아영의 오르골’은 음악을 경유해 영화의 목소리를 더 가까이에서 들어본다. (P.S. 음악을 들으며, 글을 읽어 주기를 바란다.)

〈파반느〉
〈파반느〉


어떤 이야기는 지켜주고 싶다. 경록(문상민)과 미정(고아성)의 작고 소박한 사랑을 요한(변요한)이 끝까지 지켜주려고 했던 것처럼, 내게는 이미 없는 무언가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박민규 작가의 장편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각색한 영화 〈파반느〉는 한때는 빛났던 청춘의 노스탤지어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감을 함께 그린다. 영화에 인용된 각각의 음악을 음미하다 보면, 경록과 미정의 사랑이 순수하게 싹터서 바래져 가는 행로를 따라갈 수 있다. 〈파반느〉는 영화와 음악, 모든 예술이 닮으려 한 사랑과 상실의 아름다운 이중 모자이크다.


〈파반느〉
〈파반느〉


〈파반느〉는 마음의 상처로 자신마저 외면한 세 사람이 서로에게 빛처럼 스며들며 삶과 사랑을 마주하는 이야기다. 음울한 인상 탓에 어릴 적부터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을 감수해 온 미정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산다. 취업 성적 1등으로 입사한 백화점에서도 어두컴컴한 백화점 지하창고로 내몰려 ‘공룡’이라 불리며 놀림당한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경록은 백화점의 주차 요원으로 일하다가 미정을 만나고 그녀에게 끌린다. 그리고 자유분방한 괴짜 요한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간다. 켄터키 호프에서 속내를 털어놓으며 가까워진 세 사람은 어느덧 서로에게 손전등 같은 빛이 된다.

사랑을 시작할 때의 설렘,

에밀 발퇴펠의 왈츠 ‘레 파티뇌리’

〈파반느〉


달밤에 경록이 미정을 생각하며 춤을 출 때 흘러나오는 음악 에밀 발퇴펠의 왈츠 ‘레 파티뇌리’(Les patineurs, Op. 183 "Skater's Waltz")는 이제 막 짝사랑을 시작한 경록의 설렘 가득한 마음을 경쾌한 멜로디로 표현한다. 발퇴펠이 겨울 파리의 불로뉴 숲에서 빙상 위를 거니는 스케이터들의 몸짓과 그 풍경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이 무곡은 스케이터들의 균형감 있고 우아한 몸짓과 닮아 있다. 도입부의 느린 멜로디가 서서히 3/4박자 왈츠로 전환되는 데, 이는 무겁게 내려앉은 일상에서 피어나는 경록의 사랑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19세기 파리 상류사회의 겨울 축제를 통한 순수한 오락의 순간은 춤추는 청춘의 자유로움으로, 사랑을 시작한 미숙한 이의 영원할 것 같은 기쁨으로 변모한다.

고요한 호수에 일렁이는 파문,

클로드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파반느〉
〈파반느〉


클로드 드뷔시의 ‘아라베스크’(Arabesque No.1)는 경록의 구애로 움직이기 시작한 미정의 마음을 드러낸다. 영화 속 라디오 DJ는 이 곡을 “고요한 호수에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마음에 잔잔한 파문이 이는 듯 낯설지만 설레고, 또 불안하지만 황홀하고 몽환적이면서 아름다운 곡”이라고 소개한다. 쉽사리 마음을 정하지 못해 고심하던 미정의 한숨 소리가 떨어지자, 이내 ‘아라베스크’의 상쾌한 아르페지오가 흘러나오며 그녀의 마음에 물결을 일으킨다. 〈파반느〉는 ‘아라베스크’가 흐르는 이 시퀀스로 이미 사랑에 빠져버린 미정의 마음을 설명 없이 드러낸다.

〈파반느〉
〈파반느〉


드뷔시의 초기작이자 첫 피아노 모음집인 ‘아라베스크’는 인상주의 음악의 원형을 제시한다. 그는 아르누보 미술의 아라베스크 무늬와 로마 여행을 하면서 바라본 숲, 바다, 바람으로 인해 움직이는 자연의 이미지를 음악에 투영하려 했다. 영화 속 동트는 해, 움직이는 구름, 바람에 흔들리는 영근 열매의 이미지 몽타주는 자연의 이미지를 갖고 실험한 곡 ‘아라베스크’를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몽타주는 곡의 아르페지오 음형처럼 유려하게 흘러간다. 또 소독차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에 휩싸인 미정의 모습은 사랑의 몽환적인 상태에 빠진 그녀의 심리와 이 곡의 인상주의를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방황하는 청춘의 고독,

슈베르트의 연가곡 ‘보리수’

〈파반느〉
〈파반느〉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 중 ‘보리수’(Die Winterreise Op. 89, D. 911: Der Lindenbaum)는 실연을 당한 나그네가 겨울 광야를 헤매며 겪는 방황과 고독을 노래한다. 음악의 화자인 나그네는 추운 겨울 길을 걷다가 마주한 고향 마을의 보리수를 보며, 과거 연인과 함께했던 따뜻한 추억을 떠올린다. 그는 보리수를 떠나지 못하고 거기 남아 상처 받은 마음과 고독을 안고 있다. 보리수 아래의 안식은 영원한 안식, 죽음의 기운을 드리우기도 한다. 슈베르트가 숨을 거두기 1년 전에 작곡한 곡으로 그의 병으로 인해 쇠약해진 상태의 고독과 절망이 담겨 있다. ‘보리수’는 자기 죽음을 예감한 슈베르트의 유언이다.

〈파반느〉
〈파반느〉


극 중에서 곡 ‘보리수’는 요한이 단골집 켄터키 호프에서 주인 사장에게 자신의 과거를 빗댄 이야기를 들려준 후 등장한다. 그의 자유로운 성격 뒤에는 지독한 외로움을 숨기고 있다. 경록과 미정이 서로의 일상을 함께하는 동안 요한은 여전히 그들과 함께했던 켄터키 호프에 남아 보리수에서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는 나그네처럼 빛나던 청춘의 기억을 떠올린다.

이미 사라진 빛에 대한 아련한 회상,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파반느〉
〈파반느〉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Pavane pour une infante défunte (M. 19))는 영화의 정서적 중심축으로 존재하며, 영화 전체에 우아한 슬픔과 노스탤지어를 불어넣는다. 경록과 미정이 사랑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는 이 곡은 두 사람의 관계 진전과 함께 음악의 느린 템포와 장중한 리듬으로 절정을 향해 조용히 나아가는 영화의 동력이 되어 준다. 또 유토피아를 자처하는 화려한 백화점 지하의 생들을 부드럽게 끌어안는다.

〈파반느〉


라벨은 옛 스페인 궁정의 어린 왕녀가 춤췄을 법한 파반느를 떠올리며 이 곡을 썼다고 한다. 이미 사라진 아름다움에 대한 회상을 담은 이 곡은 영화 〈파반느〉에서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추억의 아련함, 떠난 사람에 대한 그리움, 삶의 덧없음을 그려낸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5도 병행(두 멜로디가 5도 간격을 유지하며 같은 방향으로 함께 움직이는 화성 기법)과 같은 라벨 특유의 인상주의 기법은 실재가 아닌 기억과 상상, 모호한 꿈을 연상시키고, 느린 박자와 장중한 리듬은 멀리서 바라보는 과거의 장면처럼 느껴지게 한다. 또 고전적 장중함과 인상주의 색채가 어우러진 음악은 영화의 그늘진 청춘에 숙명적인 느낌을 부여함과 동시에 청춘의 상실감과 노스탤지어를 완벽하게 증폭한다.

[추아영의 오르골] 서브컬처의 메타적 재현 '초(超) 가구야 공주!'의 ‘World Is Mine’와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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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아영의 오르골] 비애와 희망의 공존 '슈퍼 해피 포에버'와 ‘Beyond The S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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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아영의 오르골] 이 땅에 광기가 있을지어다! '28년 후: 뼈의 사원'과 ‘The Number of the B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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