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아영의 오르골] '만약에 우리'는 왜 지금의 청년세대에 통했나? 비연애 세대의 연애 판타지

나는 영화 속 음악에 꽂힌다. 음악은 때때로 보이는 이미지와 들리는 대사만으로는 다 전할 수 없는 인물의 내밀한 감정을 들려준다. 창작자의 숨은 의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구가 되기도 한다. 내게 영화 음악을 이해하는 것은 영화에 가닿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추아영의 오르골’은 음악을 경유해 영화의 목소리를 더 가까이에서 들어본다. (P.S. 음악을 들으며, 글을 읽어 주기를 바란다.)

〈만약에 우리〉 스틸컷
〈만약에 우리〉 스틸컷

영화 〈만약에 우리〉가 한국 멜로 영화의 기록을 새로 쓰고 있다. 박스오피스 2위로 출발한 영화는 개봉 2주차부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라서며 역주행을 시작했다. SNS에서는 ‘울참(울음 참기) 챌린지’ 열풍마저 일어나며, 청년세대의 호응을 끌어냈다. 이처럼 관객들의 입소문을 탄 영화는 누적관객수 200만을 돌파하며 정통 멜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영화계의 통념마저 무너트렸다.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OST로 등장한 임현정의 노래 ‘사랑은 봄비처럼… 이별은 겨울비처럼’(이하 ‘사랑은 봄비처럼’)도 23년 만에 음원 차트를 역주행하고 있다. 〈만약에 우리가〉가 이토록 지금 청년세대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먼 훗날 우리〉(왼), 〈만약에 우리〉

유약영 감독의 중국 영화 〈먼 훗날 우리〉를 원작으로 한 〈만약에 우리〉는 20대 청년의 현실감 가득한 연애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는 원작에서 그려진 청년세대의 차디찬 현실과 수도 중심주의의 문화 속에서 집을 마련하지 못하고 방랑하는 청년세대의 고난을 고스란히 가져왔다. 동시에 2000년대의 시대상과 Y2K 감성을 녹여낸 로컬라이징으로 한국 관객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갔다. 특히 작품에 담겨 있는 ‘88만원세대’ 담론은 지금 시대의 청년세대가 녹록지 않은 현실과도 이어지며 공감을 얻고 있다.

정원과 은호

〈만약에 우리〉는 흑백의 현재와 생생한 컬러의 과거를 교차하며 두 남녀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10년 만에 우연히 만난 은호(구교환)와 정원(문가영)은 한때 뜨겁게 사랑했던 기억을 나눈다. 보육원에서 자란 정원은 항상 마음 둘 곳 없이 떠돌며 어딘가에 정착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정원의 채워지지 못한 욕구와 그녀의 꿈은 닮아 있다. 집을 짓고 싶다는 꿈을 품고 서울에 입성하지만, 그녀에게는 2평짜리 고시원 방 한 칸만 주어질 뿐이다. 타인의 손쉬운 무시와 손바닥만큼만 들어오는 햇빛은 정원을 주눅이 들게 만들고, 은호는 그런 정원에게 집을 내어준 사람이다. 자기 방 커튼을 걷어서 햇빛을 열어 보인 사람. 은호와 정원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된다.

〈만약에 우리〉 스틸컷
〈만약에 우리〉 스틸컷

은호는 회한 가득한 자신의 말처럼 정원에게 모든 것을 다 줄듯이 그녀를 사랑했다. 그에게는 시대의 차디찬 현실에 맞설 꿈과 열정, 패기가 있었다. 묵묵하고도 단단하게 자신의 할 일을 해 나가는 그는 정원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그랬던 은호는 현실이 조금씩 자신의 마음을 침범해 오자 방황하기 시작한다. 자기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은호는 정원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궁색하게 군다. 커튼을 걷어 햇빛을 열어 보였던 은호는 어느새 커튼을 드리워 햇빛을 사라지게 했고, 정원의 마음은 여기서 닫혀 버린다.

〈만약에 우리〉 스틸컷
〈만약에 우리〉 스틸컷

임현정의 노래 ‘사랑은 봄비처럼’은 은호와 정원의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이별의 순간까지 두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영화의 정서를 깊고 넓게 확장하는 핵심 요소로 존재한다. 이 곡은 은호와 정원의 첫 만남부터 함께한다. 고속버스에서 자신의 자리에 앉은 낯선 여자가 듣고 있던 그 노래는 어느 새 은호의 MP3에 담긴 플레이리스트가 되어버린다. 은호에게 있어서 이 노래는 자신과 정원을 이어준 곡이다. 첫사랑의 설렘-미래의 희망-현실의 고달픔-성숙한 재회까지 인물들이 겪은 마음은 모두 세세하고도 켜켜이 음악의 선율에 담겨 있다. 또 임현정의 노래는 시대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며, 영화의 레트로 감성을 더한다.

〈만약에 우리〉 스틸컷
〈만약에 우리〉 스틸컷

은호와 정원의 현실에 부닥치는 연애의 모습은 당대의 시대상을 담고 있으며, 88만원세 대의 담론을 끌어들인다. 88만원세대는 2007년 우석훈과 박권일에 의해 유래한 용어다. 이전의 세대와 달리 취업난으로 인해 대학을 졸업하고도 오랜 시간 비정규직으로 머무르며, 결혼과 출산을 하나의 선택으로 여기거나 포기하는 세대를 이른다. 사회학자 김홍중은 이들을 두고 “21세기 청년세대는 생물학적으로는 ‘청년’이지만 사회문화적으로는 ‘청춘’을 구가하지 못하는, 매우 독특한 집단을 이루고 있다”(「사회학적 파상력」, 김홍중, 문학동네, 2016, 255쪽)고 지적했다. 영화 속 인물의 현실을 이루는 풍경에서도 이는 잘 드러난다. 국가공무원을 희망하는 청년들의 경쟁률은 치솟고, 만성적인 실업이 주를 이룬다. 은호가 번번이 지원한 회사에서 떨어지는 몽타주도 이를 반영한다. 사실 정원이 간절히 바라는 “서울 내 집 마련”의 꿈은 당대 청년들이 강하게 품었던 소망을 표상한다.

〈만약에 우리〉 스틸컷
〈만약에 우리〉 스틸컷

취업난과 만성적인 실업, 좌절된 내 집 마련의 풍경은 지금의 청년세대가 마주한 현실이기도 하다. 고시원 살이를 하는 정원의 서사는 2평짜리 고시원에서 살아가는 청년 27만의 현실을 연상케 한다. 이처럼 영화는 지금의 청년들이 공감할 만한 요소를 내포해 무너져 내린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청년들이 느끼는 홀로서기의 부담과 열패감을 어루만져주는 역할을 해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는 낭만화된 청춘 서사, 연애 판타지로 존재하는 한계를 지닌다. 은호와 정원은 그들이 함께하는 공동의 생존을 꿈꾸지만, 펜데믹 이후 더 냉혹해진 현실을 살아가는 지금의 청년세대에 함께하는 연애는 사치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꿈과 욕망을 표상하는 미디어의 영역에서는 수요에 힘입어 연애 예능 프로그램이 끊임없이 양산되고 있다. 이와 같이 〈만약에 우리〉도 연애에 수반되는 위험은 감수하지 않아도 되지만, 대리 만족을 가능하게 하는 판타지로 기능한다. 〈만약에 우리〉의 흥행은 시대의 아이러니, 지금 청년세대의 사랑을 드러내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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